노동자전위 1050호와 1051호로부터
2014년 8월 8일
2014년 9월 4일

 

1934년 파업들
계급투쟁 지도부가 차이를 만들었다

당시와 지금

(1부)

대공황 4년, 1934년에 미니에폴리스의 팀스터스, 톨레도의 자동차부품 노동자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항만노동자들에 중심을 둔 3군데의 도시전역에서의 파업들의 승리가 노동계급투쟁의 거대한 고조와 강력한 산업별 노동조합들의 조직화의 문을 열 것이었다. 대공황 이래 가장 큰 경제위기가 시작된 6년 후인 오늘, 이 나라에서는 조직화된 노동자들에게 남아있는 것들이 일방적인 계급전쟁에서 계속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다. 사장들과 그들의 국가는 무자비하게 노동계급과 빈민들을 짓밟는 반면, 미국에서 파업행동은 역사적으로 남을 만큼 낮은 채로 있다.

무엇이 당시와 지금의 차이를 설명하는가? 결정적인 요소는 “빨갱이들”이 1934년 파업들을 지도했다는 것이다. 미니에폴리스에서는, 이 중서부 “오픈 샵”의 요새를 노동조합의 도시로 돌려놓는 것에 도움을 주게 될 도시의 트럭운송산업 노동자들에 의한 3번의 파업들의 선두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인 미국공산주의동맹(CLA)이 섰다. 그 과정에서, 소규모이며 직능별 지역조합 중심의 팀스터스는 수천 명의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변형되었다. 톨레도에서는, 좌익 사회주의자 AJ 머스티의 미국노동자당(AWP)이 일렉트릭 오토라이트 컴퍼니에 맞서는 파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승리가 통합자동차노동자 노동조합의 이후 조직화를 위한 무대를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스탈린주의 공산당(CP)의 지지자들이4일간의 총파업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던, 선원과 기타 해운, 항구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항만노동자들에 의한 83일 파업의 지도자들이었다. 이 투쟁으로부터 항만노동자들의 전체 연안을 아우르는 산업별 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

오늘날, AFL-CIO와 승리를 위한 변화 연맹들을 이끄는 노동조합 관료들은 경제상황이 너무도 긴박하고, 기업들이 너무도 강력하고, 파업을 파괴하는 법이라는 무기가 너무도 폭넓기 때문에, 노동조합은 간단히 파멸 당하고, 일자리들은 “외국”으로 옮겨진다면서 그러한 노동계급 전투들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34년 파업들은 역사상 가장 처참한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했다. 1929년 10월 주식시장 붕괴에 뒤이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미약한 생계를 잃는 것, 그리고 수백만의 실업, 굶주림, 노숙자의 바다로 던져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력해져 있었다. 1933년에 미국노동조합총연맹(AFL)의 조합원 수는 1920년에 그들이 보유했던 것의 절반으로 급전직하했다.

AFL의 노동조합들은 작업장의 분할을 강화하는, 그래서 자본의 세력들이 그들을 더욱 쉽게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는 직능에 기초했고, 일반적으로 고임금, 기술직 노동자들을 대표했던 반면, 흑인들과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무시했다. 대규모 자동차, 철강, 고무, 그리고 기타 산업들에서 노동하던 광대한 다수의 노동자들은 조직되지 않았고, AFL을 이끌 노동귀족들에 의하여 멸시를 당했다. 대공황의 초기에, 미국 자본주의의 보존과 수익성에 너무도 충성을 한 나머지, 이들 노동관료들은 증오를 사던 공화당 허버트 후버 행정부의 요구에 따라 “무파업” 맹세에 동의했고, 실업자를 위한 어떠한 정부 구호에도 반대함에 있어서 그 행정부와 함께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그렇게도 처참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하고, 생존을 위해 서로 싸우도록 했던 바로 그 조건들이 그들을 투쟁 속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할 것이었다. 1933년에, 약간의 경제호전이 있었다. 노동계급은 또한 1932년 민주당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의 대통령 당선과 “미국 인민들을 위한 뉴딜”을 제공하겠다는 그의 약속으로, 비록 잘못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부여받았었다. 그 다음 해에, 파업의 물결이 터져 나왔고, 대규모 노동자들이 조직화를 요구하면서 그들을 경멸했었던 바로 그 AFL 노동조합들로 향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 글에서 CLA 지도자 제임스 P 캐넌이 썼던 것처럼:

“노동자들은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고, 그 정세에서 중요한 것이다.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조직의 제1의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고, 그것을 대체할 어떠한 것도 발명된 적이 없다. 노동자들은 그 문을 통하여 계급적 발전이라는 길에서의 첫발을 디뎠다.... 그 노동조합들이 아무리 보수적일지라도, 그들의 현재 지도부가 아무리 반동적일지라도, 그리고 이 노동조합 부활에 대한 일정부분 용기와 추진력을 제공함에 있어서 루즈벨트 행정부의 진짜 목적들이 무엇인가와 상관없이,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그 자체로 계급의식적 전위에 의하여 제때에 적절하게 영향을 받는다면 모든 절대적인 형식들을 돌파하고, 모든 반동적 음모들을 쳐부술 수 있는 하나의 기본적인 힘, 파워를 의미한다.”

- “AFL, 파업의 물결, 그리고 노동조합 전망들”, 투사, 1933년 10월 14일

1934년 도시전역에 걸친 파업들에서, 노동계급의 성장하는 전투성은 전투를 감당할 수 있는 지도부와 융합될 것이었다. 이들 모든 파업들은 노동자들을 회사깡패들, 경찰들이라는 파업파괴 군대들과, 그리고 주방위군에 맞서 싸우도록 했던 사실상의 내전들이었다. 각각의 사례에서, 자본가 국가의 소위 “친 노동자적” 대리인들은 정부 중재인들이 “공정한 협약”을 협상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파업들을 끝내라고 호소했다. 파업지도자들은 정부의 지시대로 하면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그들의 투쟁들을 침식했던 모든 직능, 인종, 피부색에 따른 적대들을 강화하던 AFL 관료들과 “노동자의 집안” 내부로부터 대결해야만 했다. 차이를 만들어 냈던 것은 승리를 향한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 자본가 계급이라는 적에 맞서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들의 위력을 투쟁으로 조직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던 지도자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무장된 노동자들이었다.

루즈벨트는 “노동자의 친구”가 아니었다

AFL-CIO 관료집단은 주어진 산업에 있는 특정 산업의 모든 노동자들을 대표하려고 노력했던 산업별 노동조합들의 조직화를 이끌었던 것이 1933년에 민주당 행정부의 루즈벨트에 의하여 법제화된 전국산업부흥법(NRA) 7조 a항이라는 신화를 오랫동안 퍼뜨려왔다. 이것은 입법로비로부터 민주당을 위한 찬성표를 빼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계급협조라는 제단에 파업들과 노동조합 그 자신을 희생시켜 온 노동조합의 잘못된 지도자들이 수 십 년 동안 알리바이로 사용한 음흉한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그것의 이름이 분명하게 하듯이, NRA의 전체 목적은 미국 자본주의의 수익성 “회복”이었다. 반(反)트러스트 법들을 중지시키면서, NRA는 고용주들이 생산 할당량, 노동조건들, 최저임금들, 그리고 최장 노동시간을 정할 산업협회들을 설립했다. 그 결과는 노동에 대한 더욱 더 잔혹한 착취를 통하여 보다 많은 이윤을 짜내는 어떤 때 보다 더 강력한 자본주의 독점들의 강화였다.

“모든 피고용주들이 집단적으로 조직하고 협상할 권리를 가질 것”이라는 것을 허용했던 7조 a항은 독재적이고 한때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던, 통합광산노동자(UMW) 노동조합의 수장 존 L. 루이스의 촉구 때문에 주로 추가되었다. AFL 대표 윌리암 그린은 7조 (a)항을 지지하는 한편으로, 백합과도 같이 하얀 직능조합주의의 “고결함”을 파괴할 어떠한 조직화 운동도 계속해서 두려워했다. (그린의 지성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루이스는 한때 “그린은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그의 목이 자라나 털이 덮인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주로 노동자들에 대한 환심하기 용으로 던져지긴 했지만, 7조 a항은 또한 노동자들이 더욱 더 통제하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적어도 미국의 자본가 지배자들 중에서 선견지명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의 커가는 근심을 반영하기도 했다. 루즈벨트가 분명히 그들 중에서 가장 선견지명이 있던 자였다. 게다가, 미국의 정예 토지소유 귀족인 루즈벨트로서는 체제를 구하고 사회적 투쟁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미국 자본주의의 산업과 금융 실력자들의 일부 과도함을 억제하는 것에 관해서 덜 망설일 수 있었다.

파업행동은 이미1933년 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립라인들과 용광로들에서 노동하던 수백만의 미조직 노동자들이 그들의 숫자와 미국 산업의 핵심적인 요소로서의 그들의 전략적 지위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직능에 기초한 AFL이 노동과 자본 사이의 커가는 적대를 담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염려에서, 7조 a항은 AFL 관료집단에 있는 정부에 충성하는 노동자 협력자들의 지배하에 이들 노동자들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채택되었다.

이 일견 노동자들에 대한 양보로 보이는 것은 노동자들을 속여서 정부가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할 것이라고 믿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어떠한 잠재적인 분쟁에 대해서도 정부 중재가 쉽도록 지역 노동국들이 설치되었다. 목적은 시간을 질질 끄는 청문회로 노동자들을 말려들게 해서 파업들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NRA 통과에 뒤이어 기존의 AFL 노동조합들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합류하는 것이 고용주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나 심지어 NRA의 조건들에 의하여 모든 산업에 강요되던 비참하게 낮은 임금들을 인상하는 것 조차와도 같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1920년대 초기 이래 최대였던 1933년 파업의 물결에서 시종일관 노동자들은 대단히 영웅적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그들의 파업들은 루즈벨트의 노동중재인들의 명령들에 복종했던 AFL 최고위층들에 의하여 배신당했거나, 고용주들과 정부에 의하여 배치되었던 무장한 파업파괴자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1934년 벽두 ACLU 보고는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루즈벨트의 “뉴딜”의 결과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금지명령들, 군대들, 사적경찰, 보안관들, 노동자 간첩들과 자경단원들에 의한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그렇게도 광범위한 위반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뉴욕 타임즈, 1934년 2월 11일; 1964년 아트 프라이스(Art Preis)의 노동자의 거대한 발걸음에서 인용됨).

노동조합의 잘못된 지도자들을 향한 노동자들의 분노는 커졌던 반면, 루즈벨트에 대한 그들의 환상들은 작아지기 시작했다. 경찰과 군대 공격들의 잔혹성, 그리고 이들 공세들에 저항했었던 파업노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용기가 또한 노동자들의 의식성에 자국을 남겼다. 이들 요소들은 모두 노동자 투쟁의 더한 성장을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들이었다. 미니에폴리스의 트럭운송산업 노동자들, 샌프란시스코의 항만노동자들, 그리고 톨레도의 자동차부품 노동자들을 1934년에 승리로 이끌었던 공공연한 사회주의자들이 불씨에 불을 붙일 것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스탈린주의자들그리고 머스티주의자들

미니에폴리스 팀스터스 파업들의 지도자들 중에는 둘 다 오랫동안 노동자 투사들이었던 칼 스코글런드와 빈센트 던이 있었다. 태평양 북서안과 다른 지역의 청년벌목공, 추수철 노동자, 그리고 떠돌이 노동자로서, 던은 세계산업노동자(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IWW]에 있는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초기 개척자들과 나란히 투쟁했었다. 자신의 초기에 스코글런드는 스스로가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던 그의 고향 스웨덴에서 펄프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조합 승인을 위한 파업을 주도했었다. 그의 노동조합과 기타 정치적 활동들로 인하여 급진주의자로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스코글런드는 미국으로 옮겨와서 미국 사회당 스칸디나비아 지부의 좌익 지도자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은 미국의 많은 좌익 급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착취의 사슬들을 성공적으로 분쇄했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봉기였던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스코글런드는 1919년 공산당의 창립 성원이 되었고, 던은 그 다음 해에 합류했다.

1920년 후반에 이르러 권력으로 상승하던 스탈린이 이끌던 관료집단이 소련에서 노동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을 찬탈했고 볼셰비키주의의 혁명적 국제주의 강령을 거부했다. 미국 공산당과 세계혁명을 위한 조직적 중심으로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의하여 건설되었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혹은 코민테른)의 다른 당들에 미친 영향은 매우 파괴적이었다. 이 상황에서, 스코글런드, 던, 그리고 그의 두 형제들인 마일스와 그란트가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조직이었던 CLA로 획득되었다. 러시아혁명과 미국 CP의 퇴행에 맞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맑스주의 강령과 원칙들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고수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대공황의 황폐함에 대한 공포로 여전히 마비되어 있어 있었던 상황에서, CP로부터 축출당하고, 수적으로 작았으며 고립되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당시의 중심적 임무가 가장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과 사람들을 재편하고 정치적으로 재무장시키고 그들을 조직하는 것과 다가올 것을 그들이 알고 있던 미래의 계급전투들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1932년의 글에서 캐넌이 요악했듯이:

“공산주의 노동자들은 노동계급이 아니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오직 의식적 일부이고, 미국에서 현재 그들은 작고 수적으로 유의미한 부분은 아니다. 공산주의 노동자들 혼자서는 진정한 계급전투들을 치를 수 없다. 그들의 기능은 노동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의 선두대오들에서 투쟁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당장의 임무는 다가오는 투쟁들을 위하여 노동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 임무의 중심은 ‘끈기있는 설명작업’ 즉 투쟁의 길로 노동자들을 획득하기 위한 선동과 선전이다.

- “비합법이라는 위협”, 투사, 1932년 3월 19일

대공황 초기에 미니에폴리스 석탄회사를 위한 석탄 운송노동자로 일하던 스코글런드와 던 형제들은 그들의 동료 노동자들과의 “끈기있는 설명”의 작업을 했다. 3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들은 산업별 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투쟁이라는 사상으로 노동자들의 중핵을 획득했다. 또한 마일스 던은 소규모 팀스터스 일반 운송노동자들 로칼 574의 대표인 빌 브라운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건설하고 있는 자발적 조직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전형적인 AFL 관료가 아니었던 브라운은 훌륭한 계급적 본능을 가지고 있었고 팀스터스 노동조합의 전국 지도부에 의하여 강요되던 무파업 직능 노동조합주의에 신물이 났다. 이렇게 해서 미국 공산주의동맹의 지지자들이 이끌었던 1934년 미니에폴리스 팀스터스 파업들의 중심적인 중핵들이 모였다.

1930년대의 공산당은 매우 달랐다. 미국에서 최상의 사회주의자와 기타 노동자 급진주의자들의 세대에 의하여 러시아혁명의 충격 하에 건설된 당은 1920년대 후반에 자신의 맑스주의적 나침반를 잃어버렸다. 당은 CP의 초기 혁명적 확신을 약화시켰던 당시 미국 자본주의의 급등하던 번영과 크레믈린 스탈린주의자들의 파괴적인 영향력이라는 복합적인 압력들에 굴복하고 있었다. 이 관료적 정권 그 자체가 자본주의 서방의 보다 선진화된 나라들, 특히 독일에서의 혁명적 기회의 유실과 수년 동안의 전쟁과 궁핍이라는 소비에트 사회를 짓누르는 복합적인 하중의 산물이었다.

크레믈린 스탈린주의자들은 10월 혁명의 성과들을 뿌리채 뽑지는 않았다. 그들의 관료적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 조직들로 남아있는 노동조합들과 마찬가지로, 소련은 노동자국가로 남아 있었다. 동시에, 노동조합의 잘못된 지도자들의 사업주들에 대한 협조가 조직화된 노동조직들의 존재 그 자체를 침식해 온 것처럼,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지배는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를 위험에 빠뜨렸다 - 그리고 결국에는 그 노동자국가의 파괴를 위한 길을 닦을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에서의 노동 계급혁명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면서,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반맑스주의적 개념을 밀어부쳤다. 국제적으로 공산당들은 세계 제국주의와의 “공존”을 추구하던 크레믈린의 정책들을 위한 전초기지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변환되었다. 그 길을 따라서,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의 정치노선에서의 많은 좌우 양쪽 모두로의 선회들이 있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자본주의 세계의 화해불가능한 적대에 직면하여, 그리고 관료집단의 배신들에 맞서 투쟁했던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의 허를 찌르기 위하여 스탈린은 초좌익적 모험주의의 방침을 채택했다. 정책에서의 이 전환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코민테른은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가 전지구적으로 임박해 있어야 한다는 그 존재의 소위 “제3 기”에 진입하고 있다고 선포했는데, 이것은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현실과 괴리된 진단이었다.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정당들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들도 국제적으로 “사회 파시스트”로 규탄당했다. 미국에서는, 공산당이 굉장히 주변적인 “혁명적 노동조합들”을 형성하기 위하여 AFL 노동조합들을 포기했다. 그 결과, 공산당은 1933-34년 노동전투들에서 압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안에서는, 공산당의 지구 조직자 샘 다시(Sam Darcy)가 제3기라는 초좌익적 어리석음들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1933년 NRA 통과에 이어 AFL의 가맹단체인 국제항만노동자협회(ILA)로 항만노동자들이 밀려들어오자, 다시가 밀접하게 접촉하기 시작했었던 공산당 지지자들과 기타 항만 투사들 또한 노동조합에 합류했다. 그들의 회합장소를 딴 알비온 홀 그룹으로 알려진 이 해운노동자들의 모임은 1934년 항만파업의 핵심 지도부가 되었다. 파업의 가장 잘 알려진 지도자 해리 브리지스가 그들 중 하나였다.

비록 다시의 제3기에 대한 거부가 루즈벨트 행정부에 대한 공산당의 다가오는 귀의의 전조가 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여전히 노동계급 투쟁의 언어를 말했다. 1932년 이래 만들어져 왔던 부두노동자(WFW)라는 이름의 등사기로 인쇄되었던 신문이 루즈벨트와 NRA 노동조정관들에 대한 환상들을 반복해서 규탄했다. 이 신문은 또한 AFL 노동조합 고위층들의 직능 조합주의와 계급협조를 비판했는데, 이 자들의 고용주들과의 서로를 파괴하는 협약들이 부두노동자들과 해운노동자들이 상호간에 적대하도록 했었고, 이것들이 파업들의 반복적인 패배에 기여했었다. WFW와 자신들의 지도부의 현장투쟁들을 통하여, 공산당 지지자들은 운송사업주들, 정부, 그리고 노동운동에서 이들의 대행자들과의 전투를 위하여 항만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고 조직했다.

머스티의 조직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다른 정치적 생명체였다. 설교자이면서 평화주의자였던 머스티는 매사츄세츠의 로렌스에서 있었던 압도적으로 이주자들인 섬유노동자들에 의한 한 파업의 지도자로서 복무했던 1919년에 처음으로 노동계급 투쟁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뉴욕주의 카토나에 있는 브룩우드 노동대학의 감독관이었던 머스티는 1929년에 진보노동행동대회(CPLA)의 핵심적인 창립자였는데, 이 조직의 목적은 AFL에 압력을 가하여 “진보적”인 노동행동을 떠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대공황의 충격하에서, CPLA는 증가하는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반영하는 가운데 좌선회했고, 1933년에 창립되었던 미국노동자당의 중핵이 되었다.

1930년대 초, CPLA의 주요활동은 실업자들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톨레도의 루카스 카운티에서는 CPLA의 실업자 동맹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을 위한 현금구제를 쟁취했던 전투적인 대중행동들을 이끌었다. 실업자들을 사업주들에게 넘겨주어 그들이 파업파괴자들로서 고용되는 것에 반대하여, 노동자투쟁들의 뒤로 실업자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CPLA의 투쟁은 1934년 톨레도 오토라이트 파업을 분쇄하기 위하여 동원되었던 파업파괴자들, 경찰들, 그리고 주방위군들에 맞서도록 조류를 바꾸는데 있어서 핵심이 될 것이었다.

1934년의 3개의 도시전역에서의 파업들의 지도부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유일하게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이었다. 오직 가장 선진적이고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의 혁명정당만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의 지배를 매장시키는데 필수적인 정치적 의식과 조직으로 무장시킬 수 있음을 이해하는 가운데, 그들은 그러한 건설이라는 지극히 중요한 임무를 진척시켰다. 미니에폴리스 팀스터스 파업들의 지도자들은 그 자체로 가장 의식적이고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무리 일시적이고 과도적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항만파업을 이끌었던 스탈린주의자들과 톨레도의 머스티주의자들 모두가 계급투쟁이라는 강령에 전념했다. 당시의 다른 파업들과는 달리,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노동과 자본 사이의 “협력”이라는 거짓말을 선동했던 지도자들에 의하여 억제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사장들이 “합리적”이라거나 그들의 국가가 “중립적”이라는 어떠한 언명도 거부했던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의 거대한 힘과 연대를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지도하였다. 어떠한 노동조합 투쟁에 대해서라도 반대할 계급의 적의 힘을 이해하는 가운데, 이 파업들의 지도자들은 계급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것은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톨레도 전투”

톨레도는 실업에 의하여 황폐화되고, 디트로이트의 거대 자동차산업을 위한 부품 제조업자들이 경제의 중심을 차지하던 저임금 소도시였다. NRA 통과 이후, AFL 최고위직들은 마지못해 조립라인 노동자들의 임시적인, 직종을 넘어서는 “연맹적” 노동조합들을 설립했다. 2월에는, 톨레도에 있는 연맹 로칼 18384가 임금인상을 위하여 오토라이트를 포함하는 몇 개의 부품 사업체들을 타격했다. AFL 관료들은 그 분쟁에 대하여 지역 NRA 노동국에 의한 조정신청을 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6일 후에 파업 중단을 명했다. 협상을 하기 위하여 회사를 기다리는 것에 신물이 난 대략 500명의 오토라이트 노동자들이 4월에 다시 파업에 돌입했다.

1800여명의 파업파괴자들이 공장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출입구를 통제하는 파업노동자들의 대오들을 제한하는 법원명령으로 타격을 받은 파업노동자들은 CPLA의 루카스 카운티 실업자동맹에 도움을 호소했다. 2명의 젊은 동맹 지도자들이 자신들은 명령과는 상관없이 오토라이트 파업투쟁을 계속해서 지원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편지를 판사에게 보냈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투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금지당한, 법정을 가득 채웠던 동맹조직원들과 파업노동자들은 곧장 걸어 나와서 투쟁대열로 돌아갔다. 5월이 끝나면서 출입구를 통제하는 파업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의 대오가1만 명을 넘어서까지 불어났었다.

5월 23일에, 공장 내부와 외부에 있는 파업파괴자들을 호위하기 위하여 동원되었던, 구사대들과 경찰들의 부대가 최루가스를 일제히 분사했다. 오직 벽돌들과 돌들로만 무장하고 있던 파업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은 바리케이드들을 세웠다.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하는 가운데, 파업노동자들은 공장내부의 파업파괴자들을 포위공격했다. 경찰은 후퇴했고, 900명의 연방방위군들이 파업파괴자들에게 통로를 제공하기 위하여 투입되었다. 연방방위군들은 파업대오 속으로 직사격을 가하여 2명의 노동자들을 살해했고, 25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노동자들이 지붕과 샛길들을 통하여 이들 군대에 맞서 싸우게 되면서, 6일간의 “톨레도 전투”가 시작되었다. 5월 31일이 되자, 회사는 파업파괴자들을 내보내고, 파업협정들이 체결될 때까지 공장에서의 생산을 중단할 것에 동의했었다. 스스로도 많은 부상자를 냈던 사기가 저하된 연방방위군들 또한 철수했다.

그때 즈음 배상을 위하여 루즈벨트로 향할 것에 대하여 노동조합 조합원들을 납득시키려던 그들의 지도자들의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제외한 모든 지역 AFL 노동조합들이 총파업에 찬성하여 투표했었다. 6월 1일에 4만 명의 노동자들과 기타 파업지지자들이 카운티 법원 앞에 운집했다. 3일 후, 오토라이트 사장들은 항복을 했고 NRA 최저임금보다 높게 임금을 인상하는 것을 포함하는 6개월 단체협약에 사인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노동조합 선거들에서 어용노조들의 비례적인 대표성을 명령하던 이전의 루즈벨트의 자동차 노동국에 의한 명령과는 반대로, 노동조합이 공장에서 독점적인 협상 대리인으로서 인정되었다. 그해 말이 되면서, 루카스 카운티에서는 19개의 자동차 공장들이 더 조직되었었다.

평생동안 CLA를 계승했던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당원이 되었던 실업자동맹의 조직원 아트 프라이스는 톨레도 전투들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의 책 노동자 운동의 거대한 발걸음(1964)에서 그가 서술하였듯이:

“톨레도 일렉트릭 오토라이트 컴퍼니 투쟁이 활짝 타올라 미국 계급투쟁의 전체 지평을 밝혀주었던 것은 파업들이 연속적으로 파괴되고 있던 그런 국면이었다. 미국 노동자들은 모든 자본가 정부의 대리인들 - 법정, 노동국, 무장 군대들 - 에 어떻게 맞서고 이길 것인지에 관하여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파업 최고의 불후의 교훈들 중에 하나가 조직화되고 계급투쟁 투사들에 의하여 지도될 때의 실업자들이 노동자들의 투쟁들 속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미니에폴리스 팀스터스 파업들

미니에폴리스 트럭운송산업에서 산업별 노동조합을 수립하였던 3개의 1934년 파업들의 사건들과 지도부를 상세히 다루는 많은 책들이 쓰여 왔다. 이들 전투들의 바로 그 첫 번째 것에서의 그의 경험을 통하여 트로츠키주의로 획득된 3개의 파업들 모두에서의 청년 지도자인 파렐 도브스의 팀스터 반란자(1972), 찰스 워커의 미국의 도시미니에폴리스의 평조합원 역사(1937), 그리고 가장 최근의 브라이언 팔머의 혁명적 팀스터스(2014)가 이들에 포함된다.

몇 년 후 “위대한 미니에폴리스 파업들”에 관한 자신의 연설에서 미국 트로츠키주의 지도자 캐넌은 중심적인 교훈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미니에폴리스의 파업노동자들과 그 시기 나라 전역에 걸친 100개의 다른 파업들에 관련된 노동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고, 실제 저는 어떠한 중대한 차이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은 가장 위대한 전투성을 가지고 거의 모든 파업들에서 투쟁했습니다. 차이는 지도부와 정책에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다른 파업들에서 평조합원들의 전투성은 지도부에 의하여 억제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정부, 신문들, 종교지도자들 등등에 의하여 겁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분쟁을 거리와 파업투쟁 전선으로부터 회의장들로 옮기려고 시도했습니다. 미이에폴리스에서는 평조합원의 투쟁성이 억제되었던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조직되고 지도되었습니다....

“현대의 노동운동은 정치적으로 지도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투쟁이 매번 정부와 맞닥뜨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람들은 그것에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정치적 사고들에 고무된 정치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급투쟁의 정책이 우리 동지들을 안내했고, 그들은 전국 노동국과 다른 모든 그것의 지원기구들로 알려진 사보타지와 파괴의 메카니즘에, 그렇게도 많은 그 시기의 전쟁들에서 파업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속아서 책략에 걸려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루즈벨트의 노동국에 있는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유주의적 ‘노동자의 친구’ 대통령 루즈벨트가 미니에폴리스 트럭운송 노동자들이 시간당 몇 센트를 더 얻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어떠한 생각에도 속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당시 미네소타에 노동자의 편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던 농민-노동자 주지사가 있었다는 사실에도 속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사람들은 계급투쟁의 정책과 그들의 쪽수의 강력함과 연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노동자들의 능력말고는 아무도 어떠한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1944

노동조합 인정과 같은 온건한 요구조차도 분쟁 당사자들에 의하여 발휘되는 힘의 균형에 달려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지도부가 이해했기 때문에, 그 도시의 트럭운송산업 노동자들에 의한 3개의 파업들 모두가 주의깊게 조직되었다. 힘에 대한 첫 번째 시험은 2월의 석탄 운송노동자들의 3일 파업과 함께 왔다. 파업은 회사들의 배송들과 이윤들이 최고가 되는 영하의 겨울 날씨 동안에 회사들을 타격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계획되었다. 잘 조직화되었던 파업대오들이 파업의 첫 3시간만에 석탄배송들을 중단시켰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의 힘에 대한 인식으로 고취된, 새롭게 노동조합으로 획득된 청년노동자들은 이동하는 파업대오라는 그들 자신의 혁신을 생각해냈는데, 자동차나 트럭에 있는 파업노동자들이 파업파괴자의 트럭들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러한 “날아다니는 파업대오들”은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의 창립에 있어서 노동계급 투쟁의 핵심적인 무기가 될 것이었다.

방심했던 사장들은 파업노동자들의 협상 대리인으로 로칼 574를 인정하는 협약으로 재빨리 굴복했다. 도시전역의 노동자들은 운송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하역, 창고, 그리고 다른 내근노동자들까지도 포함하는 트럭운송산업 전반을 조직하기 위한 발구름대를 제공하는 이 승리에 충격을 받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대오들로부터 지부의 진정한 지도부로서 여겨졌고, 자발적인 조직위원회는 공식 노동조합 신분을 투표로 인정받았다. 2월 파업은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CLA 지지자들은 다가오는 전투들을 위하여 노동자들과 그들의 동맹들을 준비시키기 시작했다.

20년 동안, 시민연합으로 알려진 이 도시의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자본가들의 집단이 파업들을 박살내고 노동조합들을 무력화하는 것에 있어서 중심적인 세력이었었다. 이 집단은 첩자들과 구사대들을 고용했고 지역 경찰을 자신의 지휘 아래 확보했다. 노동조합 편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전면전이 될 것이라고 알고 있던 바에 대비하여 조직하였다. 도시의 정비소가 파업본부들로 바뀌었다. 이동하는 파업대오들로 배치된 트럭들과 자동차들을 정비하고 수리하기 위한 기계작업장에 대한 배치가 이루어졌다. 이 차량들은 파업지도자들이 파업대오 현장지도자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동안 군사적 정밀함을 가지고 파견될 것이었고, 경찰의 무선통신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식량은 파업본부들에 있는 배급소에서 매일 보급되었다. 대중회의들을 위한 강당이 하나 있었다. 본부들은 또한 부상당한 노동자들이 도시의 병원들에서 체포될 위험이 없도록 24시간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배치된 야전병원을 포함했다.

캐넌이 말했던 것처럼 “여성들이 남성들에 못지않게 이 투쟁에 결정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파업노동자들의 아내들이 파업기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던 여성지원단체로 조직되었다. 여성들은 파업본부들에서 많은 작전들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시청과 부르주아지 신문에 맞서는 효과적인 항의시위들을 수행했다. 톨레도의 예를 따라, 파업지도자들과 CLA 조직원들은 실업자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조직하는 동시에, 실업노동자들에게 파업대오들로 합류할 것을 호소했다.

이 모든 방책들이 AFL에서 가장 보수적인 직능별 노동조합들 중 하나의 일부였던 한 지부에서 취해졌다. 팀스터스 대표 다니엘 토빈은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신랄하고 무자비한 반대자였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이 당시 압도적으로 했던 것처럼 AFL 외부로부터의 급진적 수사학을 토해내기 보다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조직하기 시작할 때 그들이 아마도 이미 설립되어 있는 AFL 노동조합들로 향할 것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예측했다. 그래서 그들은 내부로부터 직능별 노동조합주의의 족쇄들을 깨뜨리기 위한 입장을 취했다. AFL의 일부로서, 로칼 574는 이미 연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다른 연맹 가맹조직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로칼 574 파업위원회의 전투성과 결의에 고무된 도시전역의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 파업노동자들에 합류했다.

5월 2번째 파업 초기에 가장 중대한 공동실천이 있었다. 여성들을 포함한 비무장의 시위대들을 늘씬하게 두들겨 팬 후에, 경찰들과 시민연맹에 의하여 조직된 “특수위원들”이 파업파괴를 위한 트럭들이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도시의 중앙시장을 열려고 움직였다. 그들은 야구방망이들, 곤봉들, 그리고 고무호스들로 무장한 노동자들과 기타 파업지지자들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이틀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가장 많았을 때, 약 2만에서 3만명이 로칼 574의 편에 섰다. 위원들과 그 다음으로 경찰들이 두려움 속에 도망가는, “위원들이 도망간 전투”로 알려지게 된 장면들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나라 전역의 극장들의 뉴스영화들에서 상영되었다. 노동자 관람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마침내 노동자가 적어도 하나의 승리를 쟁취하고 있었다.

결국, 파업지도부가 동의했고, 조합원들이 투표로 인정했던 5월 파업의 해결로 트럭운송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그 산업의 다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조합에 대한 공식적 인정이 부여되었다. 다른 단체협약처럼, 그것은 노동과 자본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전쟁에서의 타협이었고, 휴전이었다. 다른 것은 로칼 574 파업위원회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승리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기 위하여 준비되었던 그들은 친 노동조합 편의 힘을 강화하기 위하여 투쟁에서의 각각의 소강상태를 이용했다.

로칼 574는 계급의 적인 자본가 세력들뿐만 아니라 AFL 관료집단 안에 있는 노동운동 내부의 그들의 대리인들에도 맞서 있었다. 토빈은 미니에폴리스 파업들에 격노했다. 그는 첫 번째로 2월 파업을 중단시키려고 시도했지만, 파업을 금지하는 그의 편지는 파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후에야 도착했다. 그런 다음, 그는 5월 파업은 노동조합 “법들” 전부에 대한 위반이라고 선포하고, 파업지도부 안에 있는 급진적 “악마들”에 대항하는 공산주의자 색출 장광설을 내놓았다. 그런 막말들은 사장들의 파업파괴 선전을 위한 자양분이었고, 이 선전은 노동조합이 자신의 세 번째 파업을 준비하자 더욱 고조되었다.

시민동맹의 지원을 받던 트럭운송 회사들은 5월 파업해결의 약속을 어기면서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신문이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팀스터스 로칼 574가 도시에 대한 혁명적 접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비명을 지르는 한편으로, 400명의 경찰이 더 고용되었고, 기관총들과 총검이 착검된 소총들로 무장되었다. 이제 7000명이 넘는 로칼 574 조합원들이 7월 16일 재파업에 투표하였다.

미국 노동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일간 파업신문 조직자에 의하여 안내받았다. 사장들에게 고용된 미디어 필진들로부터 제기되는 공산주의자 색출과 노동조합 파괴의 일제사격에 의하여 유포된 혼란과 사기저하에 맞서, 조직자는 노동자들에게 실제 이야기를 제공했고, 투쟁을 위하여 노동자들을 준비시켰다. 제임스 P. 캐넌이 말했듯이, 이런 발전은 미니에폴리스 파업들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의 “가장 자랑스러운 기여”였다. 그리고 캐넌, 막스 샤흐트만, 그리고 기타 CLA 지도자들은 신문발행을 돕기 위하여 뿐만 아니라 파업지도부에 있는 그들의 동지들에게 결정적인 정치적 지원과 안내를 제공하기 위한 자리에 있었다.

7월 파업 개시일에 경찰들은 노동조합 파업투쟁 대오를 향해가던 노동자들을 실은 트럭에 사격을 가했다. 67명이 넘게 부상을 당했고, 이후 파업노동자 헨리 네스와 실업연맹 조직원 존 벨러 두 사람이 죽었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4만 명 정도가 네스의 장례에 집결하는 것으로 분노를 분출했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장지까지 침묵의 행진을 보장하자, 똑똑하게도 경찰들은 그 날 거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동의했다.

파업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위하여 연방중재관들이 워싱턴으로부터 급파되었었다. 5월 파업 중에, 파견되었던 이들 그리고 다른 중재관들을 파업지도부가 어떻게 다루었는지가 결정적이다. 다른 파업지도자들과는 달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정부와 정부의 대리인들이 “노동자의 친구들”이라는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맑스주의자들로서, 그들은 자본가국가와 그 국가의 모든 기관들이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장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집행할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파업지도자들은 중재관들을 만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도 많은 파업들에 사망을 선고했던, 조합원들의 등 뒤에서 만들어지는 교활한 양보교섭을 거부하면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로칼 574 지도자들은 또한 미네소타 주(州)의 AFL 관료들의 충성을 받던 교활한 행동을 일삼던 미네소타 농민-노동자 당 주지사 플로이드 B. 올손과도 대결했다. 특히 그 주지사가 노동자들의 대의를 지지하는 급진적 선동가로서의 자세를 취하는 것에 능숙했기 때문에, 올손에 대한 환상들이 노동인민들 사이에 광범위했다. 5월 파업의 전야에, 그는 로칼 574와 그 지지자들의 대중 집회에 “동지들 자신에 대한 보호와 복지를 위하여 단결할 것”을 노동자들에게 호소하는 글로 쓴 메시지를 보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캠페인을 올손이 지지한다는 것을 분명히 할 것을 원했고, 그의 공공연한 연대를 로칼 574의 투쟁을 위한 보다 폭넓은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활용했다. 동시에, 그들은 그 농민-노동자 당 주지사가 미네소타의 자본가 무장군대들의 집행권을 갖는 사령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다가오는 선거들에서 노동운동의 정치적 지지를 잃을 것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활용하면서 올손이 5월 파업에 대항하여 연방방위군을 동원하는 것을 저지했었다. 그러나 주지사로서의 그의 일은 사장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7월 파업이 전개되자, 올손은 그의 파업파괴자의 직분을 다했다.

트럭운송 회사들이 연방 중재관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해결을 거부하자, 올손은 계엄을 선포하고 연방방위군에게 거리에 진입할 것을 명령했다. 지역의 AFL 노동위원회의 잘못된 지도자들은 주지사의 정치적 경력에 대한 잠재적 손상을 걱정했던 반면, 로칼 574는 군대들을 무시하고 대중적인 항의시위를 다시 시작하자는 호소의 뒤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집결시켰다. 경찰들에 의하여 체포되었던 캐넌과 샤흐트만이 연방방위군에 넘겨진 첫 번째 사람들 중에 있었다. 잠시 후, 군대들은 파업본부들을 침입하여, 많은 최고위 파업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일부는 대량검거를 피했던 한편, 이전의 전투들에서 단련이 되었던 다른 로칼 574 조합원들이 체포된 사람들의 자리를 대신했다.

올손의 목적은 노동조합의 트로츠키주의 지도부라는 목을 자르고 몸뚱이인 조합원들이 파업을 끝낼 새로운 지도자들을 세워내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렇기는커녕 찰스 워커가 미국의 도시에서 썼듯이, “조합원들과 파업투쟁 대오들로부터 나왔었던 수 천 명의 보다 덜한 지도자들이 지금쯤은 그들 자신의 일을 배웠었던 것이 파업의 진행이었다.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는 운동의 목을 절단하기는커녕,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악마와도 같은 격분을 운동에 불어 넣었다.” 대중적인 항의시위가 다시 시작되자, 올손은 수감되었던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석방했고, 빼앗았던 파업본부들을 노동조합에 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연방방위군대는 뒤로 물리지 않았다.

치열한 5주간의 파업 후에, 고용주협회는 결국 무너졌고 타결에 동의했다. 로칼 574가 도시의 트럭운송 산업의 60%의 노동력을 위한 협상 대리인이 되었다. 몇 년 후에, 트로츠키주의 노동조합 투사들은 미니에폴리스에 있는 남아있던 트럭운송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그리고 나서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산업별 노동조합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팀스터스 창립을 위한 기초를 놓았던 중서부 전역에서의 성공적인 조직화 운동에 착수할 것이었다.

(2)

83일간의 서안 해운파업은 5월 9일에 시작되었다. 2번째 미니에폴리스 팀스터스 파업의 전야였고, 2번째 톨레도 파업은 지속 중이었다. 1934년 도지 전역들(미니에폴리스와 톨레도는 이 기사의 1부에서 토론되었다)에 걸친 파업들 가운데 가장 컸으며, 가장 오랜 기간의 서안 노동행동은 로스앤젤레스에서부터 시애틀까지에 이르는 항구들을 포함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태들, 무엇보다도 4일간의 총파업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전개되었다. 다가올 수십년 동안 샌프란시스코를 노동조합의 도시로 변화시키게 될 전투였던 파업은 무수한 노동역사들, 학문적 연구들, 그리고 기타 글들의 주제가 되어 왔다. 마이크 퀸의 거대한 파업(1949)이 필시 가장 철저한 설명을 제공한다. 또한 아트 프라이스의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거대한 발걸음(1964), 제레미 브레처의 파업!(1972), 그리고 1930년대를 포함하여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선원들, 항만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조합주의”의 역사에 관한 훌륭한 연구이기도 한 브루스 넬슨의 부둣가 노동자들(1990)과 같은 책들에서 일정정도 언급되어 있다.

1934년 서안 해운파업과 관련하여 넬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대규모 파업의 활력의 부분인 많은 맥락들 가운데 4가지가 결정적인 것으로서 두드러진다: 첫째, 사적경비들과 자경단원들로부터 총검과 기관총들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무기들을 휘두르던 연방방위군이라는 적들에 맞서는 파업노동자들의 전투성, 확고부동함, 그리고 규율, 둘째, 시대에 뒤쳐진 직능별 적대주의들을 쓸어 젖히는 그리고 총파업에서 절정을 이루는 연대, 셋째, 종종 AFL의 규범과 관료들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게 되었던 평조합원들의 독립성과 선제, 그리고 최종적으로 커지는 반공선전의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인 파도에 맞서는, 노동자들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파업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자발성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공격을 고용주들의 도구로 바라보는 경향의 성장.”

노동조합 대오들의 단호함, 전투성, 그리고 용기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때에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의 강령에 의하여 고무된 지도부를 가졌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이 지도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이것이 그들이 사장들의 반공주의적 병적흥분에 넘어가지 않았던 이유이다.

파업에 앞서, 샌프란시스코는 1919년 항만파업의 괴멸적 패배의 결과로 미국 최고의 오픈샵 도시들 중의 하나로 알려졌다. 항만노동자들은 “블루북”이라는 어용노조의 채찍 아래에서 노예와 다를 바 없이 노동했다. 이 “노동조합”은 매일 “항만노동자들을 모아놓고 뽑는 것”을 위하여 집합하도록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분배하는 것을 통제했던 부패한 깡패 사장들의 지배를 수행했다. 1933년에 이르기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국제항만노동자협회(ILA)는 존재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ILA 대표 조셉 라이안이 철권으로 그 노동조합을 전국적으로 지배했다. 그의 봉사의 대가로 그에게 몰래 상을 주던 운송회사 사장들과 자본가 정치인들의 앞잡이였던 라이안은 문자 그대로 노동조합 투사들을 처분하고 파업없는 뉴욕항을 유지하기 위하여 깡패들과 살인자들을 고용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수천 명의 서안의 다른 항만노동자들과 함께 ILA에 가입한 후, 1933년 여름에 알비온 홀 그룹의 공산당(CP) 지지자들이 지도부를 놓고 서안에 있는 라이안과 그의 꼭두각시들에 성공적으로 도전하게 될 조직화된 그룹으로서 등장했다. 그 그룹의 부두노동자(WFW) 회보는 고용주들과 정부와 대결하기 위하여 조합원들을 준비시키는 기사들을 실었다. 항만노동자들의 증가하는 분노와 투쟁정신을 표현하면서, 회보는 승리를 위한 전략을 제출했다. 회보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블루북” 어용노조를 박살낼 필요성뿐만 아니라 항만노동자들과 선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해운 그리고 항구노동자들에 의한 파업들의 반복적인 패배를 야기했었던 AFL 관료집단의 순백의 직능별 조합주의를 타도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WFW는 서안 항만노동조합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종주의, 특히 흑인노동자들이 가입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거부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이 인종주의적 배제가 흑인노동자들을 고용주들의 파업파괴 전쟁들에 동원할 준비된 소재로 만들었다. 1934년에 샌프란시스코에는 흑인 항만노동자들이 거의 없었다. 강제로 분리된 그룹으로, 2개의 부두들에서만 일하도록 고립된 그들은 이전 항만파업들에서 파업파괴자들로서의 그들의 역할 때문에 공공연하게 미움을 받거나 광범위하게 불신을 받았다. 이 인종주의적 적의가 노동조합 투쟁에 치명적으로 위험함을 주장하면서, WFW는 부두의 통합된 흑백그룹들을 요구했고, 흑인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투쟁을 요구했다.

샌프란시스코 부두들에서의 몇 몇 현장투쟁들에서의 자신의 지도력을 통하여 권위를 획득하면서, 알비온 홀 그룹은 일련의 요구들을 제출했다. 노예시장에서 일할 노예“뽑기”와 같은 고용주들의 고용에 대한 완전한 통제로부터 분리하여 노동조합이 고용을 통제할 것에 대한 요구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추가적으로, 그 그룹은 해안전역의 협약을 확보하고 모든 조직, 미조직 해운 항만노동자들의 단결투쟁을 공고히 함으로써, 항구를 항구에, 노동자를 노동자에 대결시키는 것을 끝장내려고 애썼다. 서안에 있는 1만 4천명의 항만노동자들을 대표하는 평조합원 대표들의 1934년 2월-3월 대회에서, 알비온 홀 그룹의 요구들이 채택되었다. 대회에 이어, 노동조합 대오들은 압도적으로 파업에 찬성투표 하였다. 알비온 홀 그룹의 성원들이 해리 브리지스를 지도자로 하는 샌프란시스코 파업위원회에 선출되었다.

조정에 의한 해결을 통하여 파업을 단념시키려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연방정부와 ILA의 잘못된 지도자들에 의한 반복적인 노력들 이후,, 5월 9일에 서안 전역의 항만노동자들은 작업을 중단했다. 그들 자신의 계약 요구들을 가지고 있던 선원 노동조합들이 재빠르게 그들에 합류했다. 5월 말이 되자, 적어도 2만 5천명의 해운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했다. 파업의 첫 몇일 동안에,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고용주들이UC 버클리 미식축구 팀 출신의 꽤 큰 분견대를 포함하여 거의 1000명의 파업파괴자들을 신규 채용했었다. 파업파괴를 위해 배에서 내려진 화물이 부두를 벗어나 움직이는 것을 막는데 있어서 팀스터스가 결정적이었다. 오래동안 샌프란시스코 팀스터스 로칼의 지도자였고, 자기 조직원들에게 이전의 항만파업들에 대하여 파업파괴 행위를 명령했었던, 고용주들과 시 지배자들의 믿음직스러운 동맹인 마이크 캐세이에 반기를 든 팀스터스 조직원들이 파업을 지지할 것을 결정했다.

파업 첫째 날에, 알비온 홀 조직원과 파업지도자 헨리 슈미트는 샌프란시스코 ILA 로칼의 몇 안 되는 흑인조합원들 중의 한 명과 함께 대부분의 흑인 항만노동자들이 여전히 일하고 있던 부두로 가서 그들에게 파업과 노동조합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다. 약 75명의 흑인 항만노동자들이 가입을 했고, 많은 수가 파업 대체노동에 대한 고용주들의 호소에 다른 사람들이 속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웃 지역들로 돌아갔다. 투쟁 중인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정복하기 위한 미국 자본가 지배자들의 중심적인 무기였고, 무기인 인종주의적 색깔이라는 장벽을 깨부수면서, 파업지도자들은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썼는데, 이것은 다가오는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의 노동조합 조직화 전투들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증명될 것이었다. 배이 지역 항만 로칼에 있는 흑인 항만노동자들의 수적인 증가가 전체 노동조합의 전투적 척추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총파업

미국 경제에 대한 해운운송의 중요성이라는 조건에서, 서안 해운파업은 미니에폴리스와 톨레도 파업들보다 훨씬 더 큰 정부개입에 직면해야만 했다. 루즈벨트는 ILA 관료들이 동의했던 첫 번째 파업 최종시한을 연기하려고 몸소 개입했다. 파업이 폭발한 이후, 노동부 차관 에드워드 맥그라디가 파업을 끝내려고 시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라이안과 다른 AFL 지도자들은 노동조합 관료집단의 배신의 생생한 예를 제공해주면서 운송회사 사장들, 정부와 한패가 되어 전국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활동했다. 초기 미국 사회주의자 다니엘 드 레온은 “자본가 계급의 노동자 부관들”이라는 AFL 최고위층들에 대한 적절한 묘사를 대중화시켰다.

라이안은 그가 이면 협상들에서 날조했던 거래들을 조합원들이 수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서안으로 날아갔다. 그는 “배신자” 그리고 “협잡꾼”이라는 야유와 외침들 한 가운데에서 조합원들에 의하여 가차없는 비난을 받았다. 그 역시 협상들의 한 당사자였던 팀스터스 지도자 마이크 캐세이는 파업파괴 화물을 움직이는 작업에 자기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을 복귀시키겠다고 맹세했었다. 라이안에 대한 항만노동자들의 반응을 목격한 후, 캐세이는 재빨리 자신의 약속을 철회했다.

파업의 충격 하에 경제가 비틀거리자, 시의 가장 강력한 금융과 기타 자본가적 이해관계의 집단인 샌프란시스코 산업협회가 파업파괴의 책임을 떠맡고 항구를 개방하기 위하여 개입하였다. 노동자들에 대한 유혈 맹공격을 위한 “여론”을 준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파업지도부에 대한 빨갱이 색출 공격들의 홍수가 터져 나왔다. 허스트 신문들은 “공산주의 대 미국 노동자”로 파업에 맹공을 가했던 반면, 공화당 캘리포니아 주지사 프랭크 메리암은 “작업방해 파업들”을 이끌고 있는 “무책임하고 직업적인 선동가들의 무리”에 대하여 고함을 질렀다. 6월 22일에 “항구들에 있는 공산주의적 인자들과의 모든 연계들을 거부할 것을 국제항만노동자협회, 그 조직원들, 그리고 대표자들에게 강력하게 조언하는” 발의를 통과시켰던 샌프란시스코 중앙노동위원회(CLC)의 지도부가 그런 야단법석을 그대로 되풀이 했다.

주요한 전투는 7월 5일에 벌어졌다. 도시 지배자들이 그날 항구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하자, 2천명이 넘는 파업노동자들이 파업파괴 화물의 이동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부두들에 운집했다. 경찰들과 구사대들의 부대가 군중을 향하여 최루가스와 “구토”가스를 분사했다. 뒤로 물러난 파업노동자들은 리콘 언덕으로 후퇴했다. 오로지 각목들과 돌들로만 무장을 했던 그들은 바리케이드들을 세우고 경찰을 저지하기 위하여 싸우면서 더 높은 곳으로 후퇴했다. 여러시간의 투쟁 후에, 파업노동자들은 ILA 노동조합 홀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바깥에서는 사격을 하고, 다른 노동자들을 사정권 안으로 밀어내려고 최루탄들을 내부로 집어 던졌던 수백명의 경찰들의 습격을 받았다. 7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총에 맞았고, 대부분이 등에 총을 맞았다. ILA 조직원 호와드 스페리와 공산당 지지자이면서 요리사 노동조합 조직원인 닉 보르도이스는 유혈이 낭자한 거리에 쓰러져 죽었다.

그 날이 끝날 때에, 주지사 메리암은 주방위군에게 항구지역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약 2천명의 군대에게 총검을 착검한 소총들과 기관총들이 보급되었고, “사살할 것”에 대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힘의 균형이 파업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극적으로 이동되었다. 해리 브리지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경찰, 기관총들, 그리고 주방위군의 총검들에 대항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방정식은 곧 바뀌게 될 것이었다. 곧 증가하고 있던 배이 지역 주변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총파업 조직화에 힘입어 괄목할만한 사태가 터졌다. 7월 9일에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2명의 살해된 파업노동자들을 위한 장례절차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시장 거리에서 조용하고 경건하게 행진을 했다. 심지어 산업협회의 공식적인 기록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 규율의 이 강력한 발휘의 충격에 대하여 “마지막 행진자가 대오를 벗어나자,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급진적인 노동자들의 작은 그룹의 공상적 꿈인 것으로 보였었던 총파업의 확실성이 처음으로 실질적이고도 실현가능한 목표가 되었다.”고 말했다(거대한 파업에서 인용됨).

다시 한 번 캐세이에 저항하면서, 팀스터스는 7월 12일에 파업에 돌입했다. 그 때까지는 60개가 넘는 노동조합들이 총파업에 찬성투표 했었다. 노동계급의 분노와 파업에 대한 결의라는 눈사태의 한가운데에서, CLC에 있는 지역 AFL 관료들은 “파업전략”위원회의 지도자들로서 스스로를 지명함으로써 그것을 통제하려고 움직였다. 7월 16일 총파업이 시작되었고, 4일 후에 끝이 났다. 파업노동자들은 도시로 들어오는 고속도로들에 피켓라인들을 만들었다. 파업위원회의 허가없이는 어떠한 것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질서와 규율을 유지했다. 적어도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하면서 샌프란시스코는 마비가 되었다. 그러나 고용주들과 정부는 배신적인 AFL 관료들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총파업 내내, CLC 대표 에드워드 반델레어는 샌프란시스코 시 관료들, 루즈벨트의 NRA 대표인 장군 휴 존슨과 직접적인 연락을 유지했다. 총파업 돌입 겨우 2일 만에, CLC 파업위원회는 부두파업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정부중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항만노동자들과 선원들의 치열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조처는 논란이 된 투표에서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같은 날, 경찰, 주방위군 군대들, 그리고 파업파괴 자경단원들이 반공주의적 공포의 기간을 개시했다. 일련의 습격들이 공산당의 해운노동자들의 산업별 노동조합, 당 신문 서부 노동자의 사무실들, 그리고 많은 다른 급진단체들과 회의 장소들에서 시작되었다. 사무실들과 가구, 장비가 박살이 났고,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유혈이 낭자하게 폭행을 당하고, 포위된 채 그대로 일제히 검거되었다.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고 노동조합 대의원들이 체포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기하면서, 7월 19일 CLC 관료들은 총파업을 끝내기 위한 발의를 제출했다. 대부분의 대의원들이 기권한 가운데 191대 174로 발의가 가까스로 통과되면서, 파업은 4일 후에 종결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메리암은 “노동자 조직들 안에서 건전하고, 지적이며, 바르게 생각하는 지도부가 공산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선동가들의 분별없는 권고에 승리한” 것에 감사를 표했다. 시장 안젤로 로시는 “조직화된 노동자운동의 진정한 지도자들”을 축하하는 것에 동참했고, 이번에는 ILA 대표 조셉 라이안에게 축하를 받았다.

궁지에 몰린 항만노동자들은 7월 21일 중재를 수용하는 것에 투표하였다. 자신들이 했던 것을 유지하면서도, 모든 해운 노동조합들이 투표할 때까지 작업을 거부하는 가운데, 항만노동자들은 10일 동안 작업에 복귀하는 것을 미루었다. 7월 31일 작업에 복귀하면서, 규율이 서있고 깨지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 군대인 해운과 항만노동자들은 엠바르카데로를 가로질러 함께 행진했다.

그들이 반복적으로 거부했던 바로 그 중재 과정에 복종할 것을 강요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항만노동자들과 선원들은 그들의 계급의 힘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한 채 작업에 복귀했다. 수개월 동안에 걸친 반복적인 현장투쟁들을 통하여, 그들은 부두에서 파업파괴자들을 모두 몰아냈고, 파업종료의 조건들에 개의치 않는 작업규칙들과 조건들을 수립했다.

조정에 의한 파업의 종결은 고용주들과 노동조합들에 의하여 공동으로 운영되는 고용의 전당들을 부여했었다. 이 협정 하에서, ILA는 작업배치에 대한 통제를 확보했지만, 여전히 고용주들이 가용한 노동력 가운데에서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노동조합이 배치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고, 항만노동자들이 전당으로부터 온 후보자들을 고용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고용주들과도 기꺼이 맞서고자 하면서, 노동조합은 고용에 대한 자신의 통제를 강화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사장들과 그들의 정부에 맞서도록 정치적으로 무장시켰던 바로 그 파업의 지도자들이 곧 루즈벨트의 민주당 행정부를 받아들이게 되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민주당 행정부에 종속시키게 될 것이었다.

여파

1934년 톨레도, 미니에폴리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파업들은 대량생산 산업들에 있는 노동자들을 마침내 CIO로 조직했던 1930년대 말까지의 계급전투들을 향한 길을 열었다. 원래 존 L. 루이스와 기타 노동조합 관료들이 AFL 내부의 위원회로서 조직되도록 수용했던, 산업별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운동과 연계되었던 노동조합들은 1936년 AFL에서 축출되었고, 이것은 직능별 노동조합 관료들의 오로지 기능직 노동자들만을 “노동자의 혈통” 속으로 허용하던 행위를 반영했다. AFL과 CIO는 20년 가까이 분리된 연맹들로 남아 있게 될 것이었다.

사울 알린스키는 그의 책 존 L. 루이스비공인 전기(1949)에서 무엇이 루이스로 하여금 CIO 조직화의 선봉에 서도록 했던 가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루이스는 1934년 여름 전반을 통하여 불안정하고 확 타오르는 폭력을 관찰했다. 그는 던 형제들이 미니에폴리스에서 운송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사실상의 내전으로 이끄는 것을 보았다. 피가 미니에폴리스에 흥건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해리 브리지스의 항만노동자 노동조합이 선봉에 선 총파업이 위대한 서부 도시를 4일 동안 마비시켰다.

“그 해가 가기 전에, 7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루이스는 미국 산업이라는 벽들에 있는 혁명적 손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조직되기 위하여 부글부글 끓고 있으며, 조직되기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음을 알았다.”

1934년의 도시전역에 걸친 3개의 파업들이 좌익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는 사실이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급진화된 노동자들에 대한 지도력을 획득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에 확고부동했던 루이스를 불안하게 했다. 그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노동조합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루이스는 대량생산 산업들에서 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할 필요성을 인식했던 보다 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관료였다.

UMW에서 적색분자들을 몰아냈었고, 노동조합에 대한 자신의 독재적 지배에 대한 모든 반대의 흔적을 제거했던 루이스는 이제 CIO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재능있고 경험을 가진 CP 노동조합주의자들의 유용성을 깨달았다. 루이스가 CP 당원들과 지지자들이 조직자들로서 합류하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 전제조건이 미국 부르주아지 계급의 소위 “진보적 진영”의 대표자로서 루즈벨트를 지지하기로 했던 당의 1935년 전환이었다. 이 CP의 전환의 추진력은 스탈린의 “제3 기” 정책들에 적지않은 책임이 있었던 엄청난 패배였던 1933년 독일에서의 히틀러의 나찌스가 권력에 오른 것이었다.

수백만의 노동자들으로부터의 지지를 향유하던 독일의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민주당은 히틀러 세력을 분쇄하기 위한 공동실천으로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은 노동자권력을 위한 투쟁에 반대하여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편으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공산당은 나름대로 사회민주당을 자본가들의 파시스트 돌격대들과 범죄적으로 동일시했다. 독일에서의 결과적인 참상 이후, 스탈린은 “제3 기”라는 초급진적 수사를 팽개쳤다. 1935년이 되면서, 세계전역의 공산당들은 “파시즘에 맞서는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나찌 독일에 맞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 동맹을 맺을 것을 명령받았다.

공산당원들은 여러 해 이전부터 모스크바 스탈린주의 관료세력의 정책들에 봉사하면서 맑스주의 계급원칙들을 포기해왔고, 미국 혹은 이 점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반대하는 공산당원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들을 급작스럽게 바꾸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여러모로, AFL 노동조합들이 “사회 파시스트”라고 했던 공산당의 “제3 기” 규탄들과 결별하고 ILA로 들어갔던 다시, 브리지스 등은 단순히 미성숙한 인민전선주의자들이었다.

1930년대 후반에 CIO를 건설했던 거대한 노동계급 투쟁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CP 지지자들이 있을 것이었다. 미국 노동조합운동을 전례가 없는 높이로 이끌면서, 이들 파업들은 노동계급 안에서의 계급의식의 더 한 발전을 위한 무대를 놓았고, 노동계급의 최선진 인자들은 2개의 자본가 정당들에 반대하여 노동자정당의 형성이라는 사상을 수용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과 기타 파업지도자들은 이들 노동자들을 루즈벨트의 민주당을 위한 지지로 이끌었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가 “제국주의적 쇠퇴기의 노동조합들”(1940)에서 간명하게 썼듯이:

“CIO의 상승은 노동대중들 내부에 있는 혁명적 경향들의 바꿀 수 없는 증거이다. 하지만, 그 새로운 ‘좌익’ 노동조합 조직이 건설되자마자 제국주의 국가의 강력한 포위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은 최고로 시사적이고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신구 연맹들 사이에 있는 최고위층들 간의 투쟁은 대부분 루즈벨트와 그의 내각에 대한 호의와 지지를 위한 투쟁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들의 지지자들이 미니에폴리스의 파업들을 이끌었던 CLA의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오직 혁명적 맑스주의의 원칙들과 강령에 충실한 채로 있었다. A.J. 머스티가 이끌던 미국노동자당(AWP)은 톨레도와 미니에폴리스 파업들에 뒤이어 미국 공산주의동맹과 통합하여 1934년 12월에 미합중국 노동자당을 건설했다. 그러나 머스티는 곧 종교 설교단으로 돌아갔고, 이후 시민권운동의 미래 자유주의 지도자들에게, 그리고 말년에는 베트남 반전 시위자들에게 비폭력 전략을 설교했다. 그의 조직의 다른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와 그들 나름의 타협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AWP의 “톨레도 전투” 참전자들은 트로츠키주의, 즉 1917년 러시아혁명을 고무했었던 사상들과 목표들을 고수한 채로 있었다.

미니에폴리스에 있는 그들의 기반으로부터 퍼져나가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중서부 전역에서 운송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과 허약하고 직종으로 분열된 팀스터스를 강력한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변형시키는 것의 최전선에 있었다. 팀스터스 대표 다니엘 토빈이 도와주고 부추겼던 루즈벨트 행정부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제국주의적 대량학살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반대를 이유로 스미스 법으로 그들을 폭동선동죄로 고소하면서 이러한 흐름이 막혔다. 전국적인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미니에폴리스에 있던 중앙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 합계 모두18명 - 유죄선고를 받고 수감 되었다. CP는 범죄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정부의 박해를 지지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에 맞서는 위대한 민주주의 전쟁으로 그렸던 반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재분할하려는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분쟁으로 인식했다. 모든 제국주의 참전국들의 패배를 요구하면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연합국 열강과 추축국 열강들 사이에서 누구의 편에 서지도 않았다. 동시에, 그들은 소비에트의 관료적으로 퇴행화된 노동자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방어를 위하여 확고부동하게 투쟁했다.

반대로 미국 제국주의를 히틀러의 독일에 맞서는 소비에트 노동자들의 “반파시스트” 동맹인 것처럼 묘사하던 스탈린주의자들은 전쟁 동안 미국 제국주의의 가장 열광적인 지지자들 중 하나였다. 서안의 항만 노동조합에서는, 브리지스가 무파업 맹세를, 그리고 전쟁 노력의 일환으로서 부두에서의 엄청난 작업속도 상승을 강제했다. 그는 또한 중서부에서 몽고메리 와드 노동자들에 의한 1944년 파업을 분쇄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는 CIO에 가입되어 있는 서안에 있던 국제항만창고노조(ILWU)에 파업파괴 화물을 선적할 것을 명령하던 브리지스는 모든 노동자운동이 전쟁 동안뿐만 아니라 “그 이후 무한정” 항구적인 무파업 맹세를 할 것을 모든 노동자운동에 주장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혁명적 노동자당을 위하여!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들 말한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공산당의 지도자들 스스로가 미국 정부에 대한 “폭력적 타도”에 대한 소위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스미스 법 아래에서 박해를 받았다. 브리지스 그 자신이 CP 당원이라는 혐의들로 법정으로 반복적으로 끌려갔고 추방 위협을 받았다. 스탈린주의자들 자신이 그들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자본가국가에 주장했었던 바로 그 법으로 박해를 받았다는 쓰라린 역설에 우리는 결코 흡족해하지 않는다. 이 재판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동맹”이었던 소련에 대한 1차 냉전의 시작이었다.

CIO 조직화 전투들을 지도했었던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투사들은 노동조합들로부터 쫓겨났다. 이 마녀사냥은 노동조합 관료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요구하고, 동조파업들, 파업 중인 사업장으로부터의 화물처리 거부, 그리고 기타 노동조합들을 건설했었던 계급투쟁의 무기들을 불법화했던 1947년 타프트-하트레이 법에 명문화되었다. 1949-50년에는 ILWU를 포함하여 11개의 CP와 연계되었던 노동조합들이 CIO에서 축출되었다. 자신들의 첫 번째 충성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것이었던 강화된 친 자본주의, 반공산주의 관료집단 지도부를 빨갱이에 대한 숙청들이 공고하게 했다.

관료들은 타프트-하트레이를 “노예노동 법”으로 규탄했고, 계속해서 규탄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잘못된 지도자들 스스로가 족쇄를 채우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 후 계속해서 노동조합들의 투쟁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정부의 파업파괴 법들 앞에서 굴복해왔다. 1981년 노동자 최고위 인사들이 레이건으로 하여금 PATCO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을 별 반발없이 분쇄하도록 했던 때가 분수령이었다. 무기력한 “연대”라는 단어들을 입에 담는 한편으로, AFL-CIO 지도부는 공항들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항공노조들을 파업행동으로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여파는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대오를 유린해 온 30년 간의 노동조합에 대한 쓰나미와 같은 공격이었다.

과거의 AFL 지도자들은 계급투쟁을 증오했다. 오늘날, 노동조합 최고위 인사들은 단순히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자신들의 줄어드는 조합비 기반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들은 다른 노동조합들과의 이전투구적 관할권 분쟁들을 벌이는데, 이것은 산업별 노동조합들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극복되어야만 될 직능별 노동조합들의 상호간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로의 역행이다. 자본가 지배자들에 맞서는 전투를 위하여 투쟁으로 조직하기 보다는, 관료들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수익성을 유지하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거짓말을 퍼뜨린다. 이러한 계급협조는 계급의 적인 자본가의 정당들, 특히 민주당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종속으로 요약된다.

분명히, 자신들에 맞서 배치된 세력들에 맞서 노동자들이 승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수십년간의 노동조합 관료집단에 의한 배신들에 의하여 강화된 조건인, 계급투쟁과 사회투쟁의 후퇴라는 상황에서 정세는 어느 때보다 그 기세가 꺾이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노동자 부관들의 도움을 받는 지배자들은 노동자들과 그들의 착취자들 사이의 선천적으로 화해불가능한 이해관계의 충돌인 계급투쟁을 절멸시킬 수가 없다. 오늘날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바로 그 조건들이 그들의 동맹들과 함께 그들을 계급의 적에 맞서는 전투 속으로 밀어 붙일 수 있고 그럴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이들 전투들에서 승리하는 것은 지도부의 문제이다.

1934년 파업들은 증가하는 계급 불만과 사회적 불만의 시기에서 전투적 노동조합들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성격과 자신들의 노동으로 미국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게 만드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힘을 이해했던 지도부 하에서, 노동자들은 있을 것 같지 않은 가능성에 맞서 투쟁했고 승리했다. 이 투쟁들이 증가하는 미조직 노동자 대중들을 조직화하기 위하여 오늘날 수행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종류의 전투들이다. 자신들의 착취자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승리를 위해서는, 노동자의 투쟁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이 임금 노예체제 전체를 없애기 위한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다인종의 혁명적 노동자당의 건설과 연결시키는 맑스주의 정치강령으로 그들을 획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세력이 현재는 작지만, 우리의 트로츠키주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파르타시스트 동맹의 목적은 끈기있는 교육을 통하여, 그리고 국제 노동계급 혁명정당 건설이라는 강령과 전망을 향한 투쟁의 와중에 노동자들을 획득하는 것이다.


정정

“당시와 지금” 2부(노동자전위 1051호, 9월 5일)에서,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스미스 법에 의하여 29명의 사회주의 노동자당 지도자들과 미니에폴리스 팀스터스 관료들이 유죄선고를 받고 수감 되었다고 썼다. 실제로는, 고소되었던 29명 중에서, 18명이 수감되었다.(노동자전위 1052호, 2014년 9월 19일자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