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뉴 리바이어던 시기 혁명 전략의 기본 원칙

 

 

 

                                                                                                         * 각주가 달려 있는 위 첨부 파일 참조



위의 서론에서 이미 밝혔듯이, 이 책은 그 자체로 목적인 학술적 작업이 아니다. 코로나19 위기를 엄폐물 삼은 반혁명 공세에 맞서 계급투쟁을 위한 정세인식과 전략·전술을 명확히 하기 위한 하나의 기여다. “맑스주의는 그 핵심 정수에서 혁명적 행동을 위한 일련의 방침이다라는 트로츠키의 격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성을 가진다. 그리하여 맑스주의적 분석이 현 시기 혁명적 투쟁에 어떠한 결론을 가져오는지 논의하는 것이 긴급히 필요하다.

3중 위기가 혁명가들에게 비상한 도전을 던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이 있을 수 없다. 노동자계급과 피억압자는 1929년 이후 최악의 경제공황의 결과들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동시에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기구가 동원되고, 인민은 글로벌 록다운 때문에 집에 머물도록 강제되고 있으며, 집회와 시위가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나라들에서 금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두려움 아래 살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자본주의 반혁명 정치 쓰나미다!

이 반동적 공격에 맞서 싸우기 위한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이 혁명가들의 으뜸가는 임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혁명적 노선의 중심축을 정확히 세울 수 있도록 반혁명 노선의 중심축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정치 반혁명은 맑스주의자들에 의한 정치 전략을 요구한다.

 

앞 장들에서 설명했듯이 3개의 재난 3차 대공황, 리바이어던, 팬데믹 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 영역 각각이 맑스주의자들의 강령적 대응을 요구한다. 따라서 혁명적 행동강령은 경제·정치·보건 요구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팬데믹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혁명가들은 자본가계급의 무능과 계급적 편협성과 싸우기 위한 일련의 요구를 제출해야 한다. 우리의 <보건 행동강령>에서 제시했듯이 (본서의 부록 참조), 그러한 일련의 요구는 무료 대량검사, 감염자에 대한 격리 및 위중한 경우 병원 무료 접근, 노동자 통제 하에 공중보건 부문 확대, 백신 개발을 위한 국제 협력 프로그램, 노동자 통제 하에 제약산업 몰수 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또 쏟아지는 경제적 공격에 대항하는 투쟁은 해고, 노동조건 악화, 임금삭감 등에 반대하는 요구와, 노동자통제 하에 기업 몰수, 부자들에 대한 과세에 의해 자금을 조달하는 공공 고용 프로그램 등, 이러한 일련의 요구들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 제 권리에 대한 공격에 대항하는 투쟁은 록다운, 집회·시위 금지, 경찰·군대의 비상권력, 감시체계 구축 등에 반대하는 요구가 필요하다.

요컨대, 3대 재난은 혁명가들에게 이 3대 영역 경제·정치·보건 요구들 을 모두 다루는 전략 수립을 요구한다. 그리고 올바른 전술 과제를 도출하기 위해 이 세 영역의 내적 배치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고 실로 필요하다. 우리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전 세계 지배계급들의 가장 중요한 공격 방향을 대표하는 것은 정치 반혁명, 즉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환이다.

정치적, 반민주적 공격으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결집하고 단결하고 권리를 위해 싸울 가능성이 금지, 억압되고 있다. 사업장이 폐쇄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시위와 파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 경우에 실제로 했다 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규모로 조직하고 싸우는 것은 현 반민주적 공격에 의해 사실상 전부 금지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공격은 급증하는 해고와 임금삭감에 대항하는, 그리고 더 나은 보건의료 프로그램을 위한 노동자·피억압자의 투쟁 능력을 대폭 저하시킨다. 사회적 쟁점이나 보건 쟁점에 대한 민중들의 그 어떤 진지한 투쟁도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는 정치적 법령들과 즉시 충돌할 것이다. 따라서 반동 리바이어던에 도전하는 정치적, 민주적 요구를 동시에 제기하지 않고는 경제나 보건 분야에서 그 어떤 진지한 위선적이지 않은 요구도 제기할 수 없다.

실제로 현 위기에 대응하는 자신들의 프로그램 (강령)에서 이 같은 접근법을 세우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현재 대부분의 개량주의·중도주의 세력들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그들은 더 나은 건강 보호 대책에서부터 임금삭감·해고 반대까지 일련의 요구들을 열거한다. 당연히, 모든 요구 하나하나가 진보적이고 필요한 요구다. 그러나 이러한 대부분의 강령들에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빠져 있다. 록다운 종식 요구, 집회·시위 권리 요구, 경찰국가/감시국가의 모든 측면에 반대하는 요구 말이다.

그러나 이 초보적인 결함은 그러한 강령들을 자본가와 그들의 정부에 대한 애처로운 구걸 편지로 전화시킨다! 노동자계급이 위기 때에 자본가들을 대중투쟁 없이 어떻게 양보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까? 노동자계급이 온라인 탄원서를 통해 싸울?! 이런 초보적인 진실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당혹스럽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개량주의·중도주의 좌익들은 이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 대중없이 싸우는그런 개량주의적인 전략은 무릎 꿇고 반항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아예 엎드린 채 반항하는것이다!

레닌은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이 사회주의자들의 의식에 깊은 혼란과 사고의 억눌림을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표명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연간이었다).전쟁 때문에 사고가 억눌리고 전쟁의 끔찍한 인상과 고통스러운 결과나 양상의 무게에 짓눌려 판단과 분석을 중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러한 사고의 억눌림은 맑스주의 전략 내 민주주의 투쟁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키에프스키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바로 이것이 그의 모든 불행의 진정한 근원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논리상의 오류다. 이 오류는 그것이 기본적인 것인데다 저자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펑크 난 자전거 타이어처럼 매 걸음마다 터져나온다.’ 이때는 조국 방위 문제에서, 저때는 이혼 문제에서, 또 이때는 권리에 대한 언급 가운데에서, ‘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해묵은 노예 제도의 파괴가 문제라고 하는 멋진 (‘권리에 대한 심한 경멸로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심한 무능력으로나 어느 모로나 멋진) 언사 속에서 그 오류는 뜻하지 않게 튀어나오는것이다! 이와 같은 언사는 그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강령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같은 실패야말로 현 시기 대다수 좌파들의 거대한 실패의 중심 특징이다. 그러나 실로 맑스주의자들이 현 조건에서 리바이어던 반혁명에 대항하는 투쟁을 즉 정치적, 민주주의적 투쟁 선전·선동의 중심에 두지 않고서 계급투쟁을 촉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록다운 정치에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을, 반 리바이어던 투쟁을 수행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사실상 계급휴전 정치를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 단계에서 자본가 국가에 의한 정치적 억압에 공공연하게 도전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현재의 집회·시위 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의 집회·시위 금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상 계급휴전 정치, 즉 개량주의적 투항 정치에 동의하는 것이다.

 

 

팬데믹 때 계급휴전 정치는 공중보건 방어를 위한 우리의 투쟁을 약화시킨다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다음 문제로 나아가보자. 공공연하게든, 위장한 채로든 록다운 정책을 지지하는 많은 좌파들은 자신들이 민주적 권리 금압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포스트-코로나19” 시기에는, 즉 현 팬데믹의 일정 조건들이 끝날 때는 이러한 권리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약속한다. 확실히, 몇몇 경우에 이러한 주장은 기회주의적 투항의 구실에 불과하고, 다른 경우에는 정치적 혼란의 솔직한 반영이다. 투항주의자들과는 토론이 아니라 싸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돌발적이고 일순 세상을 마비시키는 듯한 글로벌 사태에 압도되어 혼란스러워 하는 동지들과는 토론하고, 희망컨대 설득하고 싶다.

우리는 이러한 대중투쟁 일시 중단 정치를 위험한, 그리고 스스로 무장해제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첫째,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는 것이 예방 조치들 (손 씻기를 비롯한 그 밖의 표준 위생 조치들, 마스크 착용 세계보건기구는 마스크 착용에 대해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 서로 간에 일정 거리를 유지하기 등등)과 병행될 수 있고 또 병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둘째, 거리로 나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는 부르주아 히스테리 선무행렬에 합세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며칠 전 과학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치사율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간겔트 시에서 수행되었는데, 이 간겔트 시는 일종의 독일 우한으로, 본서 집필 시점에 독일에서 감염률이 가장 높은 지역 (주민의 약 15%)이었다. 연구 결과, 전체 감염자 수를 기준으로 한 치사율이 0.37%로 나왔다.

셋째, 반복해서 말했듯이, 이 바이러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2009H1N1 팬데믹 (“돼지 독감”)이 전 세계적으로 284천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했다. 세계보건기구는 매년 25만 명에서 50만 명이 계절성 독감으로 사망하는 걸로 추산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러나 독재로 나아가는 조치들에 반대하며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는 문제는 팬데믹의 심각성에 달려 있지 않다. 과거에 20만 명이나, 30만 명, 또는 50만 명이 각종 팬데믹으로 죽었을 때 세계 어느 누구도 감히 민주주의를 문제 삼지 못했다. 왜 사회주의자가, 또는 민주주의자가 코로나19 위기를 맞은 2020년에는 다른 접근법을 취해야 할까?! 50만 명이 팬데믹으로 죽을 때는 민주주의를 방어하지만, 그 보다 두세 배가 죽을 수도 있을 때는 부르주아 독재를 지지한다? 이것이 용인될 수 있는 일인가?! 다시 묻는다. 혁명가들이 아프리카에서 팬데믹이 많은 사람들을 죽일 때는 민주적 권리를 옹호하는 챔피언이 되지만, 그러한 팬데믹이 유럽과 북미에 이를 때는 부르주아 국가비상사태 체제의 지지자가 된다? 이것이 용인될 수 있는 일인가?! 이것은 노동귀족-배외주의적 위선을 비추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들에 대한 올바른 답을 모른다면, 맑스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심지어는 민주주의자도 아니다!

넷째, 팬데믹 때 계급투쟁을 중단, 연기하는 것은 생활수준을 방어하고 나아가 생명을 구하기 위한 조건을 개선은커녕 오히려 악화시킬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권위주의적 국가기구를 확대하기 위해, 사업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를 해고하기 위해, 가혹한 긴축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 현 록다운을 이용한다. 이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공중보건 부문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물질적·위생적 생활 조건도 타격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본가계급이 권좌에 더 오래 머물수록 반동적 프로그램을 밀어갈 시간이 자본가계급에게 더 많아지며 민중의 생활 및 보건 조건은 더 위험해진다.

다섯째, 계급휴전이 팬데믹과 싸우기 위한 조건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지배계급에 대한 완전히 어이없는 신뢰를 드러낸다. 어째서 자본가 지배계급이 팬데믹과 싸우는 데 더 유능하다는 것인가?! 왜 노동자계급과 농촌·도시 빈민이 진보적인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할 수 있는 것보다 자본가계급이 더 잘할 거라고 가정해야 하는가?!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항하는 투쟁은 지금 솟아나오고 있는 반동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과 병행될 수 있고 또 병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모험주의인가, 체계적인 준비인가?

 

우리는 혁명적 맑스주의의 안티 팬들이 대중이 거리에 나와 싸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정책은 모험주의적이고 초좌익적이라며 반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모든 면에서 어리석은 논리다. 첫째, 결정적인 문제는 혁명가들이 전위와 대중에게 무엇을 말하느냐다. 혁명가들은 록다운 정책이 반동적이라고 설명하는가? 혁명가들은 노동자·피억압자가 부르주아 국가를 신뢰해서는 안 되며,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조직하고 투쟁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는가? 아니면 노동자·피억압자가 록다운을 지지해야 하는가, 안됐지만 록다운을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침묵한 채로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현 시기에 결정적인 질문이다! 처음부터 RCIT는 지배계급의 반동적 공세의 실체를 대중에게 밝혀주고 록다운 정책에 반대해야 한다고 대중에게 설명하는 경우에만 혁명적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오직 대중의 의식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만이 거리의 투쟁을 촉구할 때가 왔는지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해야 할 일은, 록다운 정책에 맞서 거리에 나와 싸우지 않으면 또 한 번 후퇴를 맞을 것이기 때문에 록다운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 필요함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은 1차 세계대전 초기 국면에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취했던 것과 같다. 즉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를 요구하는 비타협적인 혁명적 노선에 깔려 있는 방법 말이다. 레닌은 1915년 제1차 치머발트 회의에 관한 글에서, 즉각 실행될 수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프롤레타리아트가 해야 할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떠한 속도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특수한 형태로 혁명적 행동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회의에서 제기된 바 없으며, 또 제기될 수도 없었다. 이를 위한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현재로선 올바른 전술을 공동으로 선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운동의 템포와 큰 흐름 내에서의 (민족별, 지역별, 직종별) 변형을 정하는 것은 그때그때 사건들에 맡겨둬야 한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나키즘적 언사에 의해 타락했다고 한다면, 밀레랑주의에 의해서도 타락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선언에서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은 채로 놔둠으로써 이러한 타락을 가중시키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유명한 팸플릿 <<사회주의와 전쟁>>에서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임무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키라는 슬로건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표현된다. 그리고 전쟁 중에 모든 일관되게 수행되는 계급투쟁과 모든 진지하게 행해지는 '대중행동' 전술은 필연적으로 이 슬로건에 이르게 된다. 강력한 혁명운동이 강대국들의 첫 번째 전쟁 중에 불타오를지, 아니면 두 번째 전쟁 중에 불타오를지, 전쟁 중일지 아니면 후일지 예언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어느 경우든,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체계적이고 확고하게 작업하는 것이 우리의 본연의 임무다.”

 

나아가 우리는 전 세계 나라들에서 정치적 조건이 불균등하게 발전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대중이 더 일찍 떨쳐 일어서는 나라들이 있을 것이다. 우한이 성도(省都)인 중국 후베이 성에서, 나이지리아, 콜롬비아, 볼리비아, 파나마 등지에서 이미 록다운과 반동적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폭동이 있었다. 브뤼셀에서는 경찰이 19세 청년을 록다운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사살한 뒤 폭력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령 식 록다운 정책이 단지 일시적으로 대중의 분노를 억제할 수 있을 뿐, 조만간 정치적 폭발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혁명가들의 임무는 조만간에 필연적으로 닥칠 일에 대비해 전위와 대중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의 해체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 뉴 리바이어던 에 대항하는 정치투쟁이 중심 고리로서 그 필요성이 긴박하게 제기되는 근저에는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근본적인 평가가 놓여 있다. 이 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자본가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간단히 요약해보자.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영역이고, 그 다음으로 국가는 떼어내도 상관없는 정치적 맹장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맑스주의자들이 많다. 이것은 널리 퍼진 오해다. 우리는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해 왔다.

자본주의는 (계급적) 대립물의 통일이다. 자본주의는 오직 경제적 생산관계와 정치적·사회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총체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들 서로 다른 층위는 상호 의존적이며 상호 의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맑스가 그리고 그를 좇아 우리도 그냥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르주아 국가기구가 작업장에서의 잉여가치 착출에 조응하는 법적 관계를 보장해주고, 필요할 경우 폭력으로 이를 집행해주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작업장에서의 잉여가치 착출은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자신을 보호해줄 국가가 없다면 세계시장에서 목표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국가는 세계적 규모에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관세와 대출 보증과 외교로, 심지어는 전쟁으로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를 지켜준다. 나아가 피억압 계급·계층을 지배 부르주아지에게 매어놓고서 착취와 억압에 어느 정도 타협하도록 만드는 촘촘히 짜인 이데올로기적 거미줄이 없다면, 계급갈등에 휩싸이는 사회의 모순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 대학, 언론매체의 역할이 여기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자본이, 그리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가 상호 연관된, 그리고 그럼으로써 사회적인 노동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자본은 상품 교환과 자본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이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규제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국가, 법적 관계, 사회 등의 중요성이 나온다. 나아가 자본은 가치 창출 상품인 노동력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만 사회적 활동 (여가, 가족 등)을 통해 회복되고, 아이들의 출산과 양육을 통해 새로운 노동력으로 보전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다시, 국가의 규제·개입 활동을 필요로 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론적 정식화가 나온다. ‘자본주의는 상품과 자본의 생산·재생산뿐만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하는 기본적인 사회적 조건의 생산·재생산을 또한 전제로 하고 있다.’ 볼셰비키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1920년에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지적했다. “재생산 과정은 생산의 물질적 요소를 재생산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생산관계 자체를 재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확대 재생산은 기존 생산관계의 확대 재생산을 의미한다. 기존 생산관계의 범위와 폭은 더 커진다. 기존 생산양식은 그 구성부분들의 내적 재편성과 함께 확산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은 그 내용물의 재생산이다...”

따라서 자본가 국가의 사회적 기능은 중립적 활동이 아니라, 맑스가 <<프랑스 내란>>의 첫 초안에서 표현했듯이 계급지배 기구로서의 그 역할에 붙매여 있는 기능이다.

러시아 볼셰비키 대표단은 1차 세계대전 중의 치머발트 운동을 위해 쓴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의 본질은 그 자신 안에 있는 중앙집권이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억압 기능에 있다. 자본의 본질이 생산수단의 기능이 아니라 인간들 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국가의 중심 성격이 한 계급의 타 계급에 대한 지배를 확실하게 해주는 것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레닌이 말했듯이, “국가는 특별 무력 조직이다. 국가는 일부 계급의 억압을 위한 폭력의 조직이다.” 이러한 국가는 독점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국내의 적 (즉 노동자계급과 민중)뿐만 아니라 외국의 적 (다른 강대국 라이벌들과 남반구 피억압 인민)에 대해서도 방어한다. 부하린의 제국주의 강도 국가범주는 이 (국가)기계에 아주 잘 들어맞는 성격규정이다.

본서에서 개괄한 것처럼, 현 자본주의 3중 재난은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 세계적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이는 일부 계급의 억압을 위한 폭력의 조직이라는 자본가 국가의 핵심 특징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파국적인 경제위기와 계급 간, 국가 간 모순의 급가속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시기의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기계에 대항하는 투쟁은 어느 혁명 조직의 정치 전략에서도 그 중심에 놓여야 한다. 국가권력의 강철주먹없이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면, 혁명가들은 이 반동적인 압제의 주먹을 깨부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혁명적 전략은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를 해체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다 환원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강령은 이행강령의 모든 핵심 요소들 부르주아지에 대한 몰수·수탈과 은행·기업에 대한 노동자통제 하의 국유화, 노동자·민중의 무장봉기에 의한 자본가 국가 타도와 대중의 행동평의회에 기반한 노동자·민중 정부로의 대체 등 을 담고 있는 경우에만 혁명적 강령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글로벌 반혁명 공세는 현 시기에 이러한 이행강령 내 특정한 추가적 요소를 부각시킨다.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 분쇄를 위한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이 그것이다. 요컨대,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투쟁과 같은 것이 아니며, 같은 것일 수도 없다. (또는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투쟁을 대체하지 않으며,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에 대한 투쟁을 맑스주의 강령의 핵심 요소로 배치하지 않고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 새 시기 맑스주의 전략의 핵심 요소

 

현 글로벌 반혁명 공세의 근본적인 반민주적 성격과 그 따른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와의 투쟁의 중요성으로 볼 때 지금 열린 새로운 시기에서는 민주주의 문제가 중심 지위를 점할 것이다. 최근의 사태발전이 민주주의 문제에 비중을 더 추가해준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실제로 현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는 수 년 전부터 이미 진행된 반민주적 사태발전이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한 것이다.

우리는 2016년에 채택된 RCIT 강령에서 이미 이 점을 지적했었다. 민주적 제 권리를 위한 투쟁은 이러한 쇠퇴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배계급은 필연적으로 민주적 제 권리를 침해, 유린하며 제한된 부르주아 민주주의까지도 자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와 독재로 대체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2015년에 발표한 팸플릿에서 이 사태발전을 보다 세부적으로 분석했다. 여기서는 그 분석의 가장 중요한 결론을 요약하고 이 결론이 현 정세에 갖는 적실성을 논의하는 것으로 국한하고 넘어갈 것이다. 이 팸플릿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 쇠퇴기에 민주주의 문제는 반식민지 나라들뿐만 아니라 21세기 제국주의 중심부에서도 계급투쟁에서 점하는 중요성이 증대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테제다. 위 인용문 중 하나에서 레닌은 "제국주의는 논란의 여지없이 민주주의 일반의 '부정'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120년의 경험은 레닌의 테제가 제국주의 시대 전체적으로는 근본적으로 옳지만, 이 시대 내 서로 다른 모든 시기들에 있어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러 이유로 인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는 확실히 대부분의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립된 시기였음을 우리는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2008/09년 자본주의 위기의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시작과 함께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당연히 이 질적 변화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선행 발전의 결과였다. 우선 자본주의 위기가 질적으로 심화되었고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양보 여지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경향의 한 예로서 우리는 제국주의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의 일부로서 이주자 문제의 중요성과 이주자 및 난민에 대한 배외주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 밖에 우리가 거론한 다른 특징들은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주민 감시의 끝없는 확대, 민주적 권리의 침해 증가, 늘어나는 제국주의 전쟁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말리, 시리아 등)”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이 제국주의 강도 국가는 국내와 국외에서 모두 지배계급의 점점 더 공격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미 몇 년 전에 RCIT2008년에 시작된 역사적 시기 이래로 어떻게 부르주아지의 반민주적 공세가 가속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우리는 또 민주적 권리에 대한 그러한 공격의 중대한 요소들을 확인해냈다. 우리는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예견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지만, 배외주의와 보나파르트주의 국가의 역할 증대에 대해 경고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문제가 노동자·피억압자의 해방투쟁에서 그 비중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민주주의 문제의 현실 관련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접근법에 기초해 있다. 맑스주의 고전들은 민주주의 문제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중요한 요소라고 항상 강조해왔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시작 몇 달 전에 레닌은 민주주의 문제의 현실 관련성을 과소평가한 동지들을 겨냥하여 논박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견해 [민족자결은 자본주의하에서는 불가능하며 사회주의하에서는 불필요하다는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자의 견해 - 역자]는 민주주의의 의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는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1)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의해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할 수 없고, (2)일단 승리한 사회주의도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시하지 않고서는 승리를 공고히 하고 인류를 국가의 소멸로 이끌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혁명적 전략 내 민주적 제 권리 투쟁의 중심 지위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특히 제국주의는 민주주의를 환상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동시에 자본주의는 대중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적 열망을 낳고, 민주주의적 제도를 만들어내며, 제국주의의 민주주의 부정과 대중의 민주주의 지향 사이의 적대를 격화시킨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오직 경제적 혁명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지, 민주주의적 개조 가장 이상적인것일지라도 에 의해서는 타도될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훈련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다양한 비평가들은 RCIT가 민주주의 문제에 중점을 둠으로써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목표를 손상시킬 것이라고 비난해왔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사양해 왔다. 첫째, 민주주의 투쟁은 계급투쟁의 일부분이고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둘째,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개량주의적 각도가 아닌 혁명적 각도에서 접근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첨예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문제를 개량주의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지배계급에게 청원하는 고립된 호소로서가 아니라, 혁명적 방식으로, 즉 노동자·민중을 모아내는 규합 슬로건으로서 제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과거 문서들에서 설명했듯이 혁명적 맑스주의자와 기회주의적 수정주의자 간의 주된 차이점은 양자 모두 민주주의 요구들을 제기한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이 민주주의 요구들을 어떻게 제기하느냐, 그리고 이들 요구에 대해 한계를 설정하느냐 여부에 있다. 위에서 언급한 팸플릿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수정주의자들과 우리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i) 수정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슬로건을 일관되게 제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반제국주의 투쟁, 이주자의 권리 등을 지지하지 않는다).

ii) 수정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슬로건을 혁명적 방식이 아니라 개량주의적인 방식으로 제기한다. 즉 그 슬로건을 부르주아 국가에게 청원하는 호소로 제출하며, 초점을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규합하는 데 두지 않고 의회 투쟁에 둔다. 수정주의자들은 또 제국주의 국가의 개혁 불가능한 반민주적 본질을 비난하지 않으며, 이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민주주의적 환상에 맞서 싸우는 데 힘쓰지 않는다.

iii) 수정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주주의 요구들에 멈추며, 이러한 요구들을 프롤레타리아 혁명 목표와 결합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하여 수정주의자들은 보통 이러한 요구들을 중심으로 별도의 민주주의 단계를 만들어내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계급투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지에 정치적으로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코로나19 위기의 첫 단계를 거치고 난 오늘, 우리는 이러한 개량주의·중도주의 세력들이 훨씬 더 질 나쁜 배신적 범죄까지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위 진술에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 지배계급들이 감행하고 있는 현 록다운 공격 같은 사안들에서 이들 개량주의·중도주의 세력들은 민주주의 슬로건을 제기하는 데서 일관되지 않은것이 아니라, 아예 반민주적 반혁명을 공공연하게 지지한다.

맑스주의자들은 민주적 권리의, 일관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가장 확고한 주창자여야 하며, 이러한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이 투쟁을 노동자계급·피억압자의 무장봉기를 통한 사회주의혁명의 전략적 과제와 결합시켜야 한다. 이것은 볼셰비키의 인식이기도 했다.

 

모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제출된 식민지의 즉각적인 해방 요구 또한 일련의 혁명 없이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회민주주의가 이 모든 요구를 위한 즉각적이고 가장 단호한 투쟁을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거부는 부르주아지와 반동을 이롭게 해줄 뿐이다). 반대로, 그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이러한 요구들이 개량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라 혁명적 방식으로 정식화되고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부르주아 합법성의 경계를 넘어 나아가 이 경계를 무너뜨리고, 의회 연설과 구두 항의를 넘어 대중을 결정적인 행동으로 끌어들이며, 모든 기본적인 민주주의 요구를 위한 투쟁을 부르주아지에 대한 직접적인 프롤레타리아적 공격으로까지, 즉 부르주아지를 수탈하는 사회주의혁명으로까지 확대·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혁명은 어떤 대규모 파업이나 거리 시위나 기아 폭동이나 군사 반란이나 식민지 반란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드레퓌스 사건이나 차베른 사태 같은 정치적 위기의 결과로도, 또는 피억압 민족의 분리독립에 관한 국민투표 등과 연계해서도 터져 나올 수 있다.”

 

요컨대, 민주주의 강령은 그 전체로서나, 핵심적인 부분들에서나 자본주의하에서는 실현될 수 없고,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확립하는 사회주의혁명 이후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음을 RCIT는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민주주의 요구들을 위한 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이끌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민주주의 대중운동이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이끌릴 때 사회주의자들은 그 운동 내부에서 싸워야 하며 노동자계급이 독립적인 세력으로 행동하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계급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 투쟁기관 (행동평의회, 정당방위대, 소비에트 등등) 구성을 내거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사회주의자들은 당면 요구/민주주의 요구 투쟁을, 노동자 통제 하에 대기업 몰수 노동자의 무장 노동자정부 수립과 같은 주요 이행기 슬로건에 대한 체계적인 선전과 결합시켜야 한다.

전체 민주주의 강령뿐만 아니라 이들 조치가 성공적으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리더십을 획득해갈 수 있는 혁명적 노동자당의 결성이 선결되어야 한다. 그러한 당은 엄격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 하에서 남반구 노동자계급·피억압자와의 연대가 말과 행동 모두에서 제국주의 중심부 노동자들의 일차적인 의무임을 분명히 하는 당이다. 이러한 국제주의가 순수관념적인 립서비스로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해 그러한 당은 혁명적 강령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일부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요약하자면, 현 코로나19 위기는 민주주의 문제, 즉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태 문제를 중심에 가져다 놓고 있다. 민주주의 강령은, 정치 반혁명에 대항하는 투쟁이 권력 획득을 위한 투쟁, 즉 부르주아지 타도/ 자본가국가 분쇄 투쟁과 결합될 때에만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다.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구를 공격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기계 일반을 공격하는 길을 연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3중 위기에 맞서는 행동강령은 경제적 요구·보건 요구를 정치적 슬로건, 혁명적 민주주의 슬로건과 연결시키고 이 후자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연속혁명 전략의 현실성

 

민주주의 문제와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투쟁 간의 밀접하고 필수불가결한 관계는 연속혁명론 처음 칼 맑스에 의해 표명되었고 나중에 레온 트로츠키에 의해 한 걸음 더 발전된 맑스주의 기본 이론 의 현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다른 글들에서 지적했듯이, 연속혁명론은 제국주의 시대에 맑스주의의 핵심 구성부분으로, 세계 각 나라에 두루 현실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트로츠키는 혁명가들이 이 이론 없이는 계급투쟁 동역학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그로부터 요구되는 전략적 과제를 도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히 했다. 1931년의 한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이 [연속혁명] 이론은 각 동시대 일국 혁명의 내적 역학 및 그 일국 혁명이 국제 혁명과 맺고 있는 중단 없는 연결을 규명하는 유일무이한 올바른 출발점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이 이론 속에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지난 30년간의 거대한 사건들의 내용이 담긴 투쟁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식에 근거하여, 좌익반대파는 개량주의자, 중도주의자, 민족공산주의자와 단호히 싸우고 있고, 싸울 것입니다. 이 공식의 가장 귀중한 장점 중 하나는 아류 모방자들의 온갖 수정주의와 연결된 이데올로기적 끈을 면도칼처럼 썰어 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연속혁명론의 세 가지 중심 측면을 간략하게 요약할 것이다. 첫 번째 측면 이 측면은 1923년 스탈린주의 관료와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 간 분파투쟁 당시의 주요 쟁점이기도 했다 은 혁명의 국제화에 대한 필요성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즉 계급과 국가가 고사(枯死)할 만큼 생산력이 발달되어 있는 사회 가 일국에서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그 자신과 레닌의 전통적 입장을 끌어대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천명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모두 모든 일국 경제들은 세계경제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일국에서 승리한 혁명을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용인할 수 없기 때문에 권력에 오른 노동자계급은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가장 중요한 전략적 임무로 삼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국 경계 내에서 사회주의혁명의 완성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부르주아 사회가 위기에 빠지는 기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생산력이 더 이상 민족국가 틀과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전쟁이,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유럽합중국이라는 유토피아가 나온다. 사회주의혁명은 일국 무대에서 시작하고, 국제무대에서 전개되며, 세계무대에서 완성된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혁명은 연속혁명 그 말의 더 새롭고 더 넓은 의미에서의 이 된다. 사회주의혁명은 우리 행성 전체에서 새로운 사회가 최종 승리할 때 비로소 완성에 이른다.”

 

둘째,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 해방 투쟁에서의 과제 민주주의 과제들을 포함한 는 그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도 실행될 수 없고, 오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하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점은 많은 민주주의 과제들 민족독립, 토지혁명, 민주적 자유권들 이 여전히 실현되지 않은 후진국들한테 특히 (그러나 오로지는 아닌) 적실성을 갖는다. 이로부터 혁명적 계급투쟁은 혁명의 분리된 단계들 속에서의 과제 실현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독재를 수립할 때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혁명의 첫 삽화적 단계들이 개별 나라들에서 어떤 것이든 간에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간의 혁명적 동맹의 실현은 공산당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정치적 지도하에서만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 민주주주의 혁명의 승리는 농민과의 동맹에 기반을 두고 무엇보다도 먼저 민주주의혁명 과제들을 해결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로 권력에 오른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매우 빠르게 맞닥뜨리게 되는 과제들이 있는데, 이 과제들은 그것을 이행할 경우 부르주아 소유권을 깊이 침해해들어 가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과제들이다. 민주주의 혁명은 직접적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 전화되며, 그럼으로써 연속혁명이 된다.”

 

마지막으로, 트로츠키는 혁명적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확립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반대로, 노동자계급은 계속적으로 혁명적 과정을 밀고 가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내부적으로는 국내의 적에 맞서, 동시에 외부로는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계급투쟁 내전과 혁명전쟁을 포함한 을 조직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은 혁명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따름이다. 사회주의 건설은 오직 일국적·국제적 규모로의 계급투쟁의 기초 위에서만 상상할 수 있다. 이 투쟁은, 세계무대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압도적인 우세 조건 하에서 불가피하게 폭발로, 즉 내부적으로는 내전으로, 외부적으로는 혁명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사회주의혁명의 연속혁명적 성격이 있다. 해당 나라가 뒤떨어진 나라인지, 즉 어제서야 자신의 민주주의 혁명을 성취한 후진국인지, 아니면 이미 오랜 민주주의·의회주의 시대를 뒤에 두고 있는 구 자본주의 나라인지에 상관없이 말이다.”

 

RCIT는 연속혁명 전략이 남반구 나라들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나라들한테도 적실성을 갖는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해왔다. 많은 소위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포함하여 각종 수정주의자들의 결정적인 패착 지점이 바로 이 특징을 무시하는 것이다. 연속혁명 전략은 불균등·결합 발전 법칙 동전의 강령적 이면이다. 그리고 이 법칙은 반식민지 나라들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중심부들한테도 해당되기 때문에, 연속혁명은 부유한 나라들에서도 중요한 전략이 되어준다.

트로츠키는 주로 소위 뒤떨어진나라들 1917년 이전의 러시아와 같은 후진 제국주의 나라들이나 식민지·반식민지 나라들 에서의 혁명적 과제라는 맥락 속에서 연속혁명론에 대해 썼지만, 동시에 이 이론이 선진 제국주의 나라들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한 점 모호함 없이 분명히 했다. 1930년대 초에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독일 그 당시 가장 선진적인 제국주의 나라 중 하나 을 예로 들었다. 이제 연속혁명의 문제는 이베리아 반도를 무대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독일에서는 연속혁명론이 그리고 이 이론 홀로 "인민혁명"론에 맞상대하고 있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좌익반대파는 아주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했다.”

동일하게 트로츠키는 제국주의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을 연속혁명 프로그램의 일부로 보았다. 반파시스트 혁명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어느 문제보다도 더 이탈리아 문제가 세계 공산주의의 근본 문제, 즉 이른바 연속혁명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 그는 미국에서 흑인 소수자의 해방 투쟁과 관련하여서도 연속혁명 전략을 꺼내들었다. 흑인들의 민족 자결은 미국에서의 연속혁명 문제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웨이스보드는 옳다.”

이 몇 개의 인용문이 이미 보여주듯이, 트로츠키가 이 문제에 대해 더 심도 있게 설명하지 않았더라도 연속혁명론이 제국주의 사회들을 포함한 세계 모든 나라에 두루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음은 확실하다. 최근의 사태발전은 연속혁명론이 반식민지 나라들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나라들 서유럽·북미와 함께 중국·러시아까지 포함하여 에도 실제로 매우 적실하다는 RCIT의 테제를 확인시켜 주었다. 민주주의 문제가 혁명적 의의를 가지기 위한 유일한, 그러나 결정적인 전제조건은 그 문제를 소부르주아 개량주의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혁명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이론과 실천에서 국제주의 없이 혁명적 전략 없다

 

RCIT는 국제주의적 접근 없이는 세계정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고서 필요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되풀이해서 지적해 왔다. 자본주의 일반과, 특수하게는 독점자본주의 (즉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는 정치적·경제적 세계체제로 이해되어야만 파악될 수 있다고 맑스주의자들은 항상 주장해 왔다. 각국의 정치·경제 관계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단지 내부적 요인에서 비롯할 수 없다. 제국주의는 함께 얽혀 있는 민족국가들 및 경제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다. 그렇기보다는 세계경제와 세계정치가 결정적 원동력이 되는 것이 제국주의다. 세계경제와 세계정치는 일국적 요인들의 용광로로 작용하며, 민족국가들 위에 군림하는 독립적인 총체를 형성한다. 세계 자본주의의 불균등·결합 발전은 한 나라의 주어진 지역적 특성과 동조를 이루며, 그 국가의 정치·경제 관계의 특수한 일국적 동역학과 융합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 같은 세계적 관점에 근거하여 맑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세계적 관점을, 그에 따라 계급투쟁에 대한 세계적 관점을 세운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정치 일반에, 그리고 특수하게는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반제국주의 전술에 심오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관점은 개량주의적인 일국 사회주의론과 완전히 상반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일국 사회주의론을 레닌과 볼셰비키가 발전시킨 그리고 나중에 트로츠키의 제4 인터내셔널이 방어한 국제주의 전략에 대한 대항마로 세웠다. 이 스탈린주의 이론은 사회주의, 즉 자본주의보다 더 높은 생활수준을 주민에게 부여하는 번영된 사회인 사회주의가 일국에서, 다른 나라들에서 노동자계급의 승리 없이 일국에서 건설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로부터 이제 소련의 대외정책은, 그리고 그에 따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치는 더 이상 혁명을 국제화한다는 목표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돕는 것이 되어야 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에 관한 그의 책에서 두 이론 간의 대조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다.

 

상호 배제적인 두 관점, 즉 연속혁명이라는 국제혁명 이론과 일국 사회주의라는 민족개량주의 이론에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다. 후진적인 중국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도 자국 일국 경계 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 일국 테두리를 넘어 성장한 고도로 발달된 생산력이 이에 저항한다. 불충분하게 발달된 생산력이 국유화에 저항하듯이 말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중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마주칠 것들과는 성격상 다른, 그러나 결코 더 가볍지 않은 어려움과 모순에 마주칠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두 경우 모두 국제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주의적 변혁에 중국이 성숙했는가 미성숙했는가 하는 문제가 들어설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여기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중국의 후진성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과제를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순서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으며,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이 책의 첫 장에서 지적했듯이, 글로벌 반혁명 공세를 특징으로 하는 현 정세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정치의 근본적인 국제적 성격을 특히 강하게 부각시킨다. 이것은 혁명적 투쟁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첫째, 위에서 설명했듯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또한 국제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이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스탈린주의 개념에 강하게 반대한다는 뜻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일국에서 성공적인 혁명 이후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계급투쟁의 국제화를 위해 노력한다.

둘째, 계급투쟁에 대한 일관된 국제주의적 인식은 강령과 당 건설 문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일국 사회주의국에서의 계급투쟁을 우선시하고 다른 나라에서의 계급투쟁을 후순위로 돌려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또한 국에서의 당 건설을 우선시하고 다른 나라에서의 당 건설을 후순위로 돌려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것은 보통 국 내 민족 소수자들과 이주자들에 대해 무지한 태도, 또는 심지어 사회배외주의적인 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컨대 일국 사회주의는 이론·강령·조직 분야에서 민족 중심주의와 민족 개량주의로 귀착된다.

실제로, 우리는 혁명가로 행동할 의향이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일국 사회주의사상에 감염된 많은 조직들이 국제 사업과는 대조적으로 일국 사업에 강하게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을 본다. 그 결과 그들은 국제 계급투쟁과 혁명적 세계당 건설 문제를 제대로 취급하길 거부한다.

트로츠키는 1928년 스탈린주의 강령 비판 속에서 일국 정치는 국제적 맥락 없이는 이해될 수 없으므로 국제 강령은 세계당뿐만 아니라 그 어느 일국 조직에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제국주의 시대인 우리 시대에는, 즉 세계경제와 세계정치가 금융자본의 헤게모니 하에 있는 시대에는 공산당이 오로지 또는 주로 자국 내의 발전 조건 및 경향만 고려하여 활동해서는 자신의 강령을 수립할 수 없다. 이 점은 또한 소련연방의 테두리 안에서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당에도 전적으로 해당된다. 191484[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 일국 강령에 영원히 조종이 울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당이 자신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의 최고 발전 및 붕괴의 시대인 현 시대에 조응하는 국제 강령뿐이다. 국제 공산주의 강령은 어떤 경우에도 일국 강령들의 총합이나 일국 강령들의 공통 특징들의 혼합물이 아니다. 국제 강령은 전체로서의 즉 그 개개의 부분들이 적대적인 상호의존을 이루고 있는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체제의 조건 및 경향을 그 모든 연관과 모순 속에서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직접 나와야 한다. 현 시대에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큰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각국 운동방향은 세계 운동방향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또 그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그 반대는 아니다. 여기에 공산주의적 국제주의와 온갖 종류의 민족 사회주의 간의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차이가 있다.”

 

같은 이유로 인해, 오직 일국 지형 위에서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혁명적 조직은 국제적 조직으로서 동시적으로 건설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국제 조직 건설을 시기상조로 간주한 혁명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가 볼 때 국제주의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잘못됐습니다. 결국 여러분은 인터내셔널을 일국 지부들의 합으로, 또는 일국 지부들의 상호 영향의 산물로 간주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일면적이고, 비변증법적이며, 따라서 인터내셔널에 대한 잘못된 인식입니다. 만약 전 세계를 통틀어 공산주의적 좌파가 단지 5명뿐이라고 칩시다. 그럼에도 마땅히 그들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일국 지부 건설과 동시적으로 국제 조직을 건설할 의무를 지게 될 것입니다.

일국 조직을 토대로, 인터내셔널을 지붕으로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여기서의 상호관계는 전적으로 다른 유형의 관계입니다. 맑스와 엥겔스는1847년에 국제 문서와 국제 조직 창설로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 인터내셔널의 창설에서도 같은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3 인터내셔널 준비 과정에서 치머발트 좌파도 그 바로 같은 길을 따라갔습니다. 오늘은, 맑스 시대보다 훨씬 더 고압적으로 이 길을 따라가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국주의 시대에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경향이 이 또는 저 일국에서 등장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고립된 일국에서 번성하고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경향은 그 형성 바로 다음날에 국제 유대, 국제 정강, 국제 조직을 찾거나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국 정책의 올바름에 대한 보장은 오직 이 길을 따라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기간 일국적으로 자폐한 상태로 남아 있는 조직은 자신을 돌이킬 수 없이 타락으로 빠뜨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국제적인 원칙에 입각한 문서가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국제반대파와 여러분의 차이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답하기를 거부합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그러한 접근법을 순 형식적이고 생기 없고, 정치적이지 않은, 그리고 혁명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정강이나 강령은 일련의 공통의 사상과 방법에 기초한 폭넓은 공동활동 경험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1925년 정강은 여러분이 정파로 존재한 바로 첫날에 탄생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죠. 러시아의 반대파는 그 투쟁 5년차에 정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 정강이 여러분의 정강보다 2년 반 뒤에 나왔지만, 그 또한 여러 면에서 구식이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세계적 체제로서 존재하며, 또 그렇게만 존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투쟁은 국제적 계급투쟁의 길을 따라가야 하며, 사회주의 세계경제와 전 세계 노동자·농민 공화국 연방의 창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한 투쟁은 세계당, 즉 일국적으로 고립된 그룹들이 아닌 국제 조직을 요구한다.




<4장. 다가오는 계급투쟁의 혁명적 전술과 슬로건>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