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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있는 언어를 위한 투쟁

19235

최근 나는 우리 신문 중 하나를 통해, ‘파리코뮌신발공장 노동자 총회가 욕설 자제와 욕설에 대한 벌금 부과를 결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요즘의 소용돌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사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신발공장이 주도한 이 일에 노동계급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중요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

저열한 언어와 욕설은 노예제도와 모멸 그리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엄성 경시의 유산이다. 특히 러시아 욕설이 더욱 그렇다. 러시아어가 아닌 다른 어떤 언어에도 그렇게 너절하고 집요하고 저열한 학대가 있는지 언어학자와 민속학 전문가들로부터 듣고 싶다. 내가 아는 한, 러시아 밖에는 그런 종류의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러시아 하층의 욕설은, 절망과 격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탈출할 여지도 희망도 없는 노예적 삶에 기인한 것이다. 반면 상류층 즉, 귀족과 통치자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욕설은, 흔들림 없는 권력 그리고 노예소유주로서의 자부심 등 계급 통치에 기반한 것이다. 속담은 보통 대중의 지혜를 담고 있다. 러시아 속담엔 대중이 지닌 무지와 미신 그리고 노예근성도 반영돼 있다. “학대는 옷깃에 붙어있지 않다(Abuse does not stick to the collar.).”[노예근성을 반영한 한국어 속담에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등이 있을 것이다.]라는 러시아의 오랜 속담은 노예제를 현실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굴욕에도 굴종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욕설은 지배자, 관료, 경찰, 배부른 부자들과 배고프고, 절망에 빠져있고, 고통에 신음하는 대중이라는 두 개의 층을 이루고 있다. 이 두 층은 저열한 욕설로 러시아인의 삶 전체를 물들였다. 혁명은 과거 잔재의 하나로 이 또한 물려받았다.

그러나 혁명은 근본적으로 예전에는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던 대중들이 인격체로 각성하는 것이다. 때때로 잔인하고 살벌한 모습을 띰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인간애의 깨달음과 전진 그리고 약자에 대해 더욱더 깊어진 관심과 더불어, 모든 개인에 대한 존중을 더 심화하는 것이다. 만약 과거 두세 겹의 노예 상태에 놓였던 여성을, 모든 힘과 수단을 동원하여, 개인과 사회의 진보의 길로 나가는 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혁명은 그 이름을 지닐 자격이 없다. 아동은 미래에 혁명이 누구의 이익을 위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만약 가능한 모든 관심을 기울여 아동을 돌보지 않는다면, 혁명은 그 이름을 지닐 자격이 없다. 안하무인으로 뿜어대는 주인과 노예의 욕설이 난무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상호 배려, 자기 존중, 여성에 대한 진정한 평등, 아동의 안전한 삶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겠는가? 오물이나 해충과의 싸움이 육체 건강을 위한 조건인 것처럼, ‘저열한 언어와의 투쟁은 지적 문화의 조건이다.

저열한 말투가 심리적 뿌리를 가지고 있고, 저열한 환경의 결과라는 점을 고려하면, 욕설의 근본적 제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신발공장의 선도적 결의를 두 손 들어 환영하며, 무엇보다도 새로운 운동의 주창자들이 인내심을 많이 갖기를 바란다. 대를 이어 내려와 우리 삶에 깊숙이 배어든 심리적 습관은 매우 끈덕진 것이다. 이제 막 힘찬 전진을 시작했고 힘을 집중하여 과거 잔재를 쓸어버리기 시작한, 러시아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할 수 있다.

파리코뮌공장이 선도한 운동을 우선적으로 공산주의 대오 내 노동여성들이 지지하기를 희망하자.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이 보통 여성에게 더 모욕적 언어를 구사하고 아이들을 덜 배려한다. 이 점은 교양 없는 대중뿐 아니라, 선진적인, 심지어 이른바 이 사회 질서를 이끄는 부류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10월 혁명 이후 6년이 지난 지금도 혁명 이전의 언어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지도부에도 상당히 남아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도시, 특히 모스크바를 벗어나면, 당국자들은 억센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의무라고 여기고, 그것이 농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의 삶은 경제에서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 나라 중심 모스크바 근교마저도 늪이나 험한 길을 지나야 한다. 그러다가도 유럽이나 미국 기술자마저도 깜짝 놀랄만한 기술 장비를 갖춘 공장을 만난다. 과거의 자본가들은 혁명과 몰수의 시기를 통과하고 지금도 살아남아 폭리를 취하고 합법 분야에서 야금야금 이윤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탐욕스럽고 야비한 생활 태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세계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심지어 지도에서도 찾기 어려운 어떤 나라의 혁명 대의를 위해서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최상의 공산주의자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가장 높은 수준의 혁명적 이상주의와 저열한 태도 사이의 사회적 대비와 더불어, 같은 마음 내에 심리적 대비도 존재한다. 대의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훌륭한 공산주의 남자이더라도, 여자를 진지한 주체가 아니라, 단지 여성으로만 대하기도 하고, 또는 믿음직한 공산주의자가, 민족 문제를 다룰 때는 절망적으로 반동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 의식의 여러 부분이 동시에 그리고 평행하게 변화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생각의 변화 과정에는 어떤 법칙이 있다. 인간 심리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리고 어떤 요구로 인한 변화와 삶의 압력은 그 일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부분에 먼저 영향을 준다.

러시아에서 지난 수십 년간 사회정치적 발전은 놀라울 만큼 비약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경제와 정치는 물론이고 사회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지금 혼란의 원인이다. 같은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난다. 그로 인해 선진적이고 깊은 수준의 정치적 사고와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감정적이고 습관적인 생각이 기묘하게 섞여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당을 위한 일반적으로 교육과 자기 교육을 위한 올바른 정식은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을 통해 의식의 모든 영역을 손질하여 바로잡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극도로 복잡하여 학교 수업이나 책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모순과 심리적 비일관성은 인민 삶의 혼란과 무질서에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심리는 무엇보다도 삶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 의존은 완전히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둘은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한다. 문제는 다각도로 분석되어야 한다. 파리코뮌 공장의 방식이 그중 하나이다. 그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길 바라자.

저열한 언어와의 싸움은 러시아 언어생활의 순수성, 명료성, 아름다움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반동적 멍청이들은, 혁명이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러시아어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지금 엄청난 양의 단어들이 우연히 생겨나 사용되고 있는데, 그중 많은 단어는 전혀 필요 없는 저속한 표현이고, 어떤 것들은 우리 언어 정신을 해치고 있다. 그러나 반동적 멍청이들은 러시아어의 미래에 대해 상당히 잘못 알고 있다. 혁명적 혼란에서 벗어나 우리 언어는 유연성과 섬세함이 증대되고 강화되어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혁명 이전에 관료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언론의 꽁꽁 굳었던 언어는, 새롭고 훨씬 더 정확하고 역동적 표현으로 이미 상당히 풍부해졌다. 그러나 혼란과 격동 속에서 우리 언어는 확실히 크게 방해받았다. 무엇보다도 문화 분야의 진보는, 한편으로 말할 나위 없이 귀중한 혁명기의 언어적 성취를 보존하면서, 우리의 말에서 쓸모없는 말과 표현, 그리고 우리의 언어 정신에 반하는 것들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언어는 사고의 도구다. 정확하고 올바른 언어는 정확하고 올바른 사고의 전제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상 처음으로 노동계급이 집권했다. 노동계급은 일과 삶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문학교육은 물론이고 독서와 글쓰기 기초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지금 지배계급이 된 노동계급은 그 자체로 그리고 사회적 성격으로 인해, 러시아어의 위대함과 진실성을 강력히 지켜낼 계급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교육 부재로 인해] 쓸모없고 오염되고 비열한 단어와 표현의 침투에 전면적으로 맞서지 못하고 있다. ((several) 주 또는 몇 개월이라는 표현 대신) ‘한 쌍(pair)의 주또는 한 쌍의 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고 추하다. 언어를 풍부히 하기보다 오히려 개악하고 있다. ‘이라는 말은 그 과정에서 (‘한 쌍의 비둘기등에서처럼) 원래의 의미를 잃었다. 잘못된 단어와 표현은 잘못 발음된 외국어의 침투로 인한 것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프롤레타리아 발언자마저도, ‘인시던트(incident)’인싱던트(incindent)’라고 하거나, ‘인스팅트(instinct)’인스티스(instice)’라고 하기도 하고, ‘레귤럴리(regularly)’을레귤럴리(legularly)’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잘못된 발음법이 혁명 이전에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어로 번역된 지금 이 글은, 러시아어 원문이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언어는 그 언어공동체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나라 역사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원래 언어의 미묘한 의미와 어감 차이를, 번역을 통해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한국적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반영으로서의 언어 상황도 비슷한 것이 많으므로, 그를 통해 유추하며 읽어주기를 독자들께 당부한다.]

잘못된 자부심으로 인해, 이런 잘못된 표현을 바로잡는 사람이 드물다. 그것은 틀렸다. 교육과 문화를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의 선진부위에 극도로 풍부하고 세련되고 정밀한 러시아어를 제공할 것이다. 언어의 고귀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상 언어에서 잘못된 단어와 표현을 솎아내야 한다. 언어 또한 위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노동계급엔 다른 계급보다 더욱 건강한 언어가 필요하다. 노동계급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연과 삶 그리고 그 토대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명료하고 날카로운 언어는 바로 그 생각을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다.

 

The Struggle for Cultured Spee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