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뒤덮는 불길이어야 진정한 분노

― AIG 보너스 소동에 대하여

노동자공동투쟁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현재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미국은 그 진원지이자 그 공황의 전개양상이 가장 격렬한 국가 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거기에서는 이미 수조 달러의 구제자금을 퍼붓고 있지만, 세계를 주름잡던 5대 투자은행이 파산이나 인수‧합병 등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을 뿐 아니라 자산 규모 1‧2위를 다투는 시티은행이나 뱅크어브아메리카(BOA) 같은 거대 은행들도, 그리고 GM이나 포드, 크라이슬러 같은 거대 기업들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생존 가능성 여부가 아직 미해결의 문제로 되어 있다. 공황의 방아쇠였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그러니까 주택 대출금을 갚지 못한 수백만이 이미 길거리로 내쫓겼거나 내쫓기고 있고, 실업자가 매월 60만 명 이상씩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터진 한 소동을 소개하고 싶다. 국내에도 이미 보도된 AIG 보너스 소동이다.

한국 내에도 진출해 있는 AIG는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이다. 이 회사 역시 현재 전개되고 있는 대공황=금융위기 속에서 거대한 손실―2008년 4/4분기에만도 미국 기업사상 최대인 620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을 입고 1,500억 달러 이상의 구제금융으로 연명하고 있는데, 이 회사가 경영간부들에게 수백만 달러씩 1억6,500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불함으로써 대소동이 벌어졌다. 수백만이 길거리로 쫓겨나고 있는 대공황의 와중에서 구제금융, 즉 사실상 대중의 세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회사의 간부들이 거액의 보너스 잔치를 벌인 데 대하여 대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죽여 버리겠다”는 위협들이 공공연하게 날아들고, 보너스 지급을 분명 사전에 미리 알고도 묵인한 것으로 보이는 오바마 정권의 책임까지 묻고 나섰기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 역시 짐짓 분노를 표시하고, 의회는 보너스의 90%를 세금으로 환수하는 특별법을 들고 나섰으며, 뉴욕주의 쿠오모(Andrew Cuomo)검찰총장은 보너스를 “반납할래? 아니면, 명단이 공개되어 망신을 당할래?”(Andrew Clark, “AIG staff were told to repay bonuses or face public exposure”, guardian.co.uk, 2009. 3. 24.) 하고 협박하고 나섰다.

개인별 보너스 금액은 적게는 1천 달러에서 많게는 650만 달러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보너스 잔치에 대한 대중의 분노 혹은 증오가, 그리고 그에 대한 AIG의 공포가 얼마나 큰 것이었가는 AIG가 직원들에게 내렸다는 다음과 같은 경고에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회사 표시가 있는 어떤 옷도 입지 마라.

∙ 사무실 밖으로 나갈 때에는 AIG 뱃지가 안 보이도록 확인하라.

∙ 수상한 사람을 조심하고, AIG 사무실 옆에서 비정상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으면 건물 경비원에게 신고하라.

∙ 밤에는 가능하면 짝을 지어서 다니고, 주차는 밝은 곳에 하라.

∙ 공개된 장소에서 AIG에 관한 대화는 피하고, 기자들과 회사에 대해서 얘기하지 마라.

∙ AIG 뱃지를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면 곧바로 보고하라.

∙ 미행당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즉각 911에 전화하라.

∙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서 개인 정보를 얘기하지 마라.

∙ AIG 건물 내의 방문객은 모두 AIG 직원을 동반하고 있는지 확인하라.

∙ 창문이나 열쇠, 출입문이 부서졌거나 억지로 다룬 흔적이 있으면 즉각 신고하라.

∙ 가능하면 문에 기대서지 말고, AIG 작업장으로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을 조심하라.

∙ 기타 모든 수상한 행동들은 모두 경비원에게 보고하라. (Andrew Clark, “AIG warns staff to travel in pairs after death threats over bonuses”, guardian.co.uk, 2009. 3. 21.)

여러 압력과 협박에 굴복하여 3월 23일 현재로 미국 내의 20대 수령자 가운데 15명이 약 5천만 달러에 이르는 보너스를 반납하고 나섬으로써 소동은 일단 진정국면으로 들어서고 있으나, 소동의 의미는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다만, 실제로 지급된 보너스가 애초에 말려졌던 것보다 32%가 많은 2억1,800만 달러라는 보도 등도 있어, 향후 추이가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다.)

구제금융으로, 즉 대중의 세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회사가 그러한 거액의 보너스 잔치를 벌인 데 대해서, 그러한 파렴치와 탐욕에 대해서 대중이 분노하고 나선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부터다.

어떤 노동조합은 버스를 동원하여, AIG의 경영간부들이 살고 있는 “황금해안”(gold coast)으로 알려진 코넥티커트의 부유층 주거지역으로 항의시위까지 벌였다는 보도도 있는데, 대중이 이렇게 AIG의 보너스 잔치 그것에, AIG에 분노하고 나서는 데에 그치고, 기껏해야 가이트너 재무장관 등 오바마 행정부의 ‘감독 소홀’에 분노하고 나서는 데에 그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분노는 이해하지만, 분노가 거기에 그치는 것은 분명 대중이 문제의 본질은 보지 못한 채 그 표면만을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부르주아 언론은 록펠러가 어쨌느니, 빌 게이트가 어쩌니 하면서 대자본가의 자선을 대서특필하며 찬양한다. 그들의 저 거대한 소득, 거대한 재산이 노동자들을 착취한 것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한 채 그 소득의 한 조각을 동냥 주듯 적선하는 것만을 그렇게 찬양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성격과 운동법칙은 철저히 은폐한 채 문제를 개인적 행태의 문제로 제기한다. 그렇게 대중의 의식을 장악하고 조작한다. (AIG의 부사장 중의 하나(Jake DeSantis)가, 자신은 보너스 742,006달러를 정당하게 벌었고, 그것을 “세계적인 경제침체로 타격을 받은 사람들을 지원하는 자선단체들에 기부할 생각”이었는데, 회장(Edward Liddy)이 보너스를 방어해주지 못해 배신당했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간 것도 바로 그러한 대중조작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 백기사 자신이 그러한 대중조작의 희생자일지도 모르지만.)

AIG의 저 파렴치한 보너스 잔치에 대한 분노 역시 그렇게 조작된 의식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급적 분노임은 분명하나 아직 즉자적인 것이다.

거액의 보너스를 받은 AIG의 경영자들이 보너스를 반납하고 나서고, 더 나아가서 이를 계기로 다른 기업들, 다른 자본가들도 그런 파렴치한 보너스 잔치를 벌이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건 다 그만두고 하다못해, 공황으로 무너지고 있는 노동자 대중의 생존권이 조금이나마 지켜질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저 대중의 카타르시스, 그러니까 보다 근본적으로 폭발해야 할 분노가 엉뚱하게 폭발하여 사그라드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 의회가, 뉴욕주의 검찰총장이 짐짓 ‘분노’하고 나서는 것도 바로 그러함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그치는 분노는 어쩌면 “으레 그런 놈들!” 하는 냉소보다도 못한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라는 착취체제가 존속되는 한 그러한 탐욕은 어떤 형태로든 존속되고 지배할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으레 그런 놈들!” 하는 냉소는 바로 그 점을 꿰뚫어본 결과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물론 대중의 분노를 그것이 당장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폄하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계급의식에 기초한 분노로 발전할 때 그 분노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양태로 폭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공황이 이른 시간 내에 수습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국가와 독점자본은 가히 천문학적 자금을 퍼붓는 등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정책수단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위기의 폭발 자체가 그간의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정책수단 그것에 의해서 지체되어 왔기 때문이다. 위기가 장기화되고 깊어지면서 대중의 투쟁과 의식도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의식이 한 발 더 나아가자마자 그러한 분노야말로 세상을 뒤덮는 불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