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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피해자의 경험에 입각한 확장된 성폭력 개념의 정립
번호 5 분류   조회/추천 948  /  41
글쓴이 WOM100    
작성일 2001년 02월 20일 02시 02분 40초
자유게시판(WOM100 2) [263/1277]
제 목: 피해자의 경험에 입각한 확장된 성폭력 개념의 정립
올린이: WOM100(tsWOM100) 2000.12.26 16:25:17 조회: 480

피해자의 경험에 입각한 확장된 성폭력 개념의 정립

운동사회 성폭력 가해자 명단이 공개된 후 일부 사건의 피해자들은 더 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100인 위원회의 명단발표에 대해 많은 반응이 있지
만, 그 중에서 '이것도 성폭력이라 볼 수 있는가' 란 질문을 받는 사건의 경우 더
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왜 성폭력이 아닌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 성폭력이라 생각하는지 오히려 질문을 되돌려주고 싶다. 피해자가 얼마만
큼의 신체적 상해를 입었는지 혹은 정신적 고통을 당했는지에 대해 수치로 판단
하려는가? 피해자들은 사건이 소위 일반적 기준이라는 잣대로 보았을 때 경미해
보이거나 중해 보이거나에 상관없이 모두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많은 상처들을
받았으며, 지금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폭력에 있어 경중
의 구분을 부정하는 이유이며, 피해자 및 잠재적 피해자가 스스로 판단하여 인정
하는 성폭력의 사실은 모두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대하게 침해한 폭력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도 성폭력인가?'라고 묻는 이들에게 답한다. 지금 당신들이 알고 있는 '성폭
력'의 개념조차, 애초에 강제적 성기삽입(통상적 의미에서의 강간)만을 성폭력으
로 간주하던 가부장적 논리를 깨고 여성의 성적자율권을 되찾으려는 용기 있는
피해자들과 여성주의자들의 부단한 싸움을 통해 쟁취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너
무나 다양한 유형의 성폭력들이 채 '언어화'도 되지 못한 채 피해자에게 고통과
침묵만을 강요하며 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의 경험에 입각한 확장된
성폭력 개념의 정립은 100인 위원회의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대부분 섹슈얼리티와 연관되어 있다. 성적 공격과 학대, 착
취와 같은 경험들은 수치로 측정하거나 계량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기존
의 사회과학 조사방법과 같은 양적 접근으로는 여성의 폭력 경험을 가시화하기
힘들다. 페미니스트들은 폭력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정하기보다 여성들 자
신이 폭력을 무엇으로 정의하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은 방문
인터뷰나 집단 대화를 통해 연구대상자들과 만났으며, 여성들이 스스로를 말하도
록 하였다. 이런 작업을 통해 연구자들은 피해자들의 경험에 기반하여 폭력 개념
을 확장시켰다. 예를 들어 성기노출의 경우, 남성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라
도 이런 경험과 관련하여 여성들은 깜짝 놀라고 모욕감과 불쾌감을 느낄 뿐만 아
니라 종종 엄청난 두려움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피해 당사자의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면 성기노출은 분명한 폭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 또한 어떤 연구자들은 병
원에서 남성의사가 여성환자를 대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의료적 치료라고 여겨
지는 신체적 개입이 여성에 대한 폭력임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제까지 여성에 대
한 폭력은 가장 분명한 폭력의 형태여야만 폭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비가시화되었던 여성의 폭력 경험을 새로운 개념틀과 방법론을
통해 폭력의 범주 속으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젠더시각에서 본 폭력, 이정주)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어떤 양태로 나타나던 간에 성을 매개로 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성격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피해자의
경험에 입각한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확립해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 어떤
이는 이러한 규정이 너무 포괄적이고 너무 주관적이며 따라서 공정치 못하다고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의제기는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부풀릴
가능성이 있다는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아니면 피해자를 자신에게 일어난 일
조차 판단 못하는 금치산자로 취급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 어떠한
피해자도 피해사실을 만들어 내거나 부풀리지 않는다. 여성들은 같은 행위라도 어
떤 것이 자신을 여성으로 대상화한 성폭력인지 혹은 정말 저 사람이 실수한 것인
지 구분할 수 있다. 여성들은 오히려 성폭력 사건이 운동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봉
합되었는지, 어떤 식으로 드러났는지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흔
히들 생각하기에 경솔하게 혹은 쉽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드러
내지 못한다. 성폭력 경험을 공개하는 과정에서도 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축소
하는 경향을 보이기는 해도 실지로 부풀려 진술하지 않으며 부풀려 진술할 수도
없다.
우리는 성폭력의 개념이 피해자의 경험에 기반 해 성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폭력 사건의 특징이 사적인 자리에서 은밀히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것을 전제한
다면 또 객관적 증거나 증인의 부재,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반된 기억을 전제한다
면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성폭력 사실 자체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
각이다. 성폭력은 그것의 물리적 심각성에 의해 단편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 권력관계에서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양한 형태
의 힘과 권력을 사용하였다는 것과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여성으로서 당했을 수
많은 형태의 성폭력의 경험을 그 안에 위치 지워야 한다. 따라서 성폭력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경험에
의해 그 상황에 대해 반응하고 그것에 대해 규정 내리는가'이다. 또한 이것은 피
해자뿐만 아니라 잠재적 피해자들까지도 피해자로 인정하여 더욱 넓게 그 범위가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닌, 이미 여러 국가에서, 그리고 학내
여성주의 운동 등 국내에서도 일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여
성에 대한 폭력은 피해자 및 잠재적 피해자들의 정의로부터 출발되어야 하며, 따
라서 반성폭력 운동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잠재적 피해자들의 생존을 위한 권리주
장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번 100인 위원회의 운동사회 성폭력 가해자 실명공개 명단에는 여러 가지 유형
의 성폭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위에서 서술한 성폭력 개념의 확장에 대한 우
리의 원칙을 드러내는 것이다.


▲ 성폭력 사건의 유형

운동사회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은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운동사회라고 하는 특수성과 일반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남성중심적인 문화가 혼
합되어 운동공간 속에서의 친밀함을 이용한 성폭력,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상
대 여성에 대한 지배욕구의 관철, 권력의 우위를 이용하거나 운동의 대의명분 이
용, 해결과정에서의 2차가해 등의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유형들은 명확
하게 나누어지기보다는 복합적으로 혼재되어 드러나고 있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
겠다.

① 같은 활동공간 내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한 성폭력

성폭력은 대부분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운동사회도 예
외는 아니다. 친밀한 사이에는 그만큼의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들지 않게 마련이
며, 기존 성폭력 개념에서 성폭력으로 규정 내리기 힘들었던 스토킹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그 폭력의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또한 평소의 관계에서 느꼈던 친밀함
을 기반으로 성적 접촉에 대한 합의를 강요하거나 일방적으로 합의했음으로 규정
하고 성폭력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피해자는 심한 압박과 혼란을 느꼈음
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명확하게 문제제기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데 이것이 기존 성폭력 사건 사실 여부의 기준이 되었던 '피해자 동의'에 대해 논
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피해자의 동의'라는 부분이 누구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가에 따라 그 해석이 너무도 다를 수가 있음을 명확히 보아야
한다. 가해자의 '기억' 속에서 당사간의 합의라고 인식되었거나 혹은 주관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그 합의라는 것이 피해자의 '기억' 속에선 당시엔 자신의 상황
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차마 거부의사를 표현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폭
력적 정황들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여
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순결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관계들에 대한 구체적 상을 가
지지 못함으로써 어떻게 현재의 남성중심적 프리섹스주의로 '폭력적으로' 경도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관계-남녀 건, 사람사이 건-에서의 진실성 여
부와 여성으로서 자기 스스로가 대상화되고 있다는 판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
던 상태에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주변의 다른 여성활동가들에게도 반복적으
로 일어나고 있었던 사실은 피해자들이 이후 그것이 명백한 폭력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가해자는 반복적으로 주변의 여성활동가들에게 관계
의 혼동을 가중시키며 이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 '진정성'을 믿고 출발했던 관
계에서 여성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여성으로서 대상화되었고 욕망의 배출구였다는
것을 어느 순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00인위의 발표 이후 몇몇 사건을 단순히 '인간관계'나 '애정'의 문제로 치부하는
반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나 '애정'은 성폭력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없으며, 피해자가 성적자율권을 침해당했다고 느꼈다면 그
것은 과거의 인간관계와 상관없이 성폭력이다. 오히려 운동사회 내에서의 성폭력
중 상당수는 잘 아는 사이에서 '친밀함'이나 '동지적 애정'을 빌미로
자행되고 있
다. 바로 그러한 특성 때문에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사실을 인식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혼란과 자아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끊임없이 자기자신에게
'내가 과민한 것이 아닌가'하는 반문을 하는 가운데 정신적/신체적으로 고통스러
워하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성폭력 담론에서도 친밀한 사이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가중처벌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친밀한 사이에서의 성폭력 사건의 경우는 그 정신적
피해가 매우 극심하다. 사례1 김성희, 사례4 박을락, 사례6 박진홍, 사례9
이영주,
사례10 이영태, 사례13 정병도, 사례15 허영구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② 남성 중심적인 문화의 연장으로 드러난 성폭력

가부장적 남성 중심사회 속에서 남성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들이 고스란히 운동사
회 속에도 투영되고 있는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사례 3 김정두, 사례 14 최재혁
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들 성폭력 사건들은 주로 논쟁 중에 자신의 의견이나 의도가 관철 혹은 받아들
여지지 않을 때 상대 여성에게 폭력을 사용하거나 콘돔을 부는 행위 등 남성지배
성의 과시로 피해여성을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형태의 성폭력은
여성에게 성적인 모욕감을 주면서 성폭력을 통해 남성들의 지배욕구를 발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만연한 남성중심적인 사회분위기는 남성들에게 무의식적인
우월의식을 심어주며 이런 무의식이 여성활동가들을 어떤 식으로 건 짓누르는 행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성폭력은 성적 만족을 위한 행위라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
고자 하는 격앙되고 과격한 욕구의 표현', '성폭력의 기저는 폭력, 분노와 지배욕'
임을 강조했던 린다 레드레이의 주장에 그대로 부합한다. 이런 폭력에 직면한 여
성은 수치심으로 비롯된 무력감을 넘어서서 분노와 굴욕감으로 몸서리치게 되는
것이다.

③ 운동의 대의와 권력을 이용한 성폭력

가부장제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성폭력의 유형이다. 운동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데 주로 조직 내에서의 직위를 이용한 경우, 운동사회라는 도덕적으로 우월해 보
이는 집단의 명망을 배경으로 한 혹은 그 명성을 이용한 성폭력 등이고 사례 2
김용범, 사례 5 박일문, 사례 7 송보순, 사례 8 이경수, 사례 11 이일재,
사례 12
전성백 등이 이에 포함된다.
운동사회에서 노동운동 혹은 빈민운동과 학생운동과의 권력관계에서의 성폭력 사
례나 조직 내에서 직위를 이용한 성폭력, 선후배 사이의 관계, 학생회 조직체계
상의 지위를 이용한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박일문 사건의 경우도 소설가라는 직위
와 평상시 자신이 정치범이었음을 주장하는 등 운동사회라고 하는 정치집단이 갖
는 사회에서의 기대치를 이용하여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한 경우이다. 이 경우들은
피해자들이 친밀한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처음 만나는 사이
라도 이러한 직위와 사회적으로 주입된 생각들 속에서 가해자에 대한 특별한 경
계심을 보이지 않는다.

④ 피해자에게 더욱더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2차 가해

운동사회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제기되는 경우 대부분 많은 상처들 속에서 흐지
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진상조사단이 꾸려진다고 해도 객관적 사실에 대한 입증이
라는 명목 하에 피해자의 피해와 고통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가해자보다 더욱
자세하게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해 반복적으로 진술해야 하며 가해자와 어긋나는
진술에 대해서는 대부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는 대부분 '조직보위', '운
동권의 도덕성 수호', '더 중요한 사안에 집중하기 위한 단결', '동지애적 감싸주
기' 등의 대의에 대한 압박감과 고통 속에서 피해사실을 축소하게 되고 이것은 결
과적으로 피해자의 인격과 피해사실 모두를 의심받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
한 행위는 명백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이며, 직접적인 성폭력은 아닐 지
라도 사실을 은폐하고 축소시키며 피해자를 활동공간에서 떠나게 만드는 많은 원
인이 되고 있다. 사례 16 정용주의 경우가 그러하다.
성폭력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피해자는 두 번 성폭력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는 직접적인 성폭력에 의해, 두 번째는 경찰이나 재판과정에서의 모
욕적인 과정과 가해자 주변의 동조자들로 인해서이다. 그만큼 남성중심적인 사회
에서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운동사회 내에서
성폭력 사건은 매우 빈번히 발생하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의 경우 사건 해결과정
에서 수많은 2차 가해들이 자행되고 있다. 2차 가해의 문제는 때로는 직접적인 성
폭력보다 더 심각한 폭력으로 남는다. 1차 가해 사실에 대해서 제대로 해결이 된
다면 피해자는 훨씬 쉽게 고통을 치유할 수 있고, 활동공간에서 남아있을 수 있지
만 대부분의 경우 2차 가해에 의해 피해자들은 활동했던 공간을 떠나고 더 큰 자
기분열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이미 학내 성폭력 방지 규약을 제정하는 과정에
서 "가해자에 대하여 동조하며 피해자를 가해하는 자 역시 함께 처벌한다"는 내용
이 포함되고 있는 등 2차 가해 문제의 심각성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100인
위원회는 2차 가해 행위는 성폭력은 아니지만 명백히 피해자에게 더욱 큰 폭력을
행사하는 심각한 가해행위라 판단하며 이러한 2차가해 행위에 대한 광범위한 인
식의 전환과 확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누가 성폭력 사건의 경중을 이야기하는가

위에서 유형별로 살펴본 성폭력 상황에서 우리는 성폭력 사건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아니 제 3자의 입장에서 경중을 따질 수 없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소위 '경미하다'고 일컬어지는 성폭력 사례의 경우에도 피해자가 받
은 고통과 모멸감은 그 무엇과 비할 바 없이 극심하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례
에서 피해자는 과민한 피해망상 환자쯤으로 취급받거나 오히려 음모를 가진 가해
자로 취급받는 등 피해자가 당하게 되는 정신적 테러는 훨씬 더 가혹하다.
전반적으로 100인 위원회가 발표한 사례들을 보면서 '저 정도 가지고...' 란 반응
은 그만큼 성폭력이 피해자의 경험과 인식에 기반하지 않고, 남성위주의 사회가
가지는 일반적인 가해의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으며 비가시화된 수많은 성폭력 사
건들이 은폐된 채 숨겨져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역설적으로 성폭력
의 심각성을 이야기해 준다.
성폭력이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된 모든 종류의 성적 자율권 침해'로 정의되어
야 한다는 것은 반(反)성폭력운동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폭력 개념은 반성폭력운동의 지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칙으로서 힘
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설사 추상적인 원칙으로는 동의를 한다하더라도 구
체적인 사건에서는 거의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100인 위원회는 다양한 양상을 띠고 나타나는 성폭력 사건을 구체적으로 공개함
으로써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된 모든 종류의 성적 자율권 침해'라는 성폭력 개
념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유효한 원칙으로 자리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성폭력은 경중이 따로 없는 폭력 그 자체이며,
단지 다
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뿐인 폭력이므로 피해자의 고통과 판단에 입각하여 정의되
어야 하며, 피해자의 경험과 언어를 통해서 언제나 확장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하
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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