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신민>조선인의 제국협력 『일본군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2014·06·26 
 

박유하(세종대 일어일문학과)

[서평] 
<황국신민>조선인의 제국협력
『일본군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1
서울대 안병직교수 연구팀이 발굴한『일본군위안소관리인의 일기』(2013/ 8.이숲)는, 20년 이상 한일간 갈등을 빚어온 위안부문제에 관한 이해를 심화시켜줄 결정적인 자료로 보인다. 

 이 책은 경기도 파주시의 사설박물관 타입캡슐에서 발견된 26권의 일기 중1943년과 1944년 분을 번역하여 원문과 함께 수록된 책인데, 상세한 해제와 함께 말미에는 버마에서 포로가 된 업주와 위안부를 대상으로 미국이 작성한 자료(`미국전시정보국심리작전반의 『일본인포로심문보고』제49호및 연합국최고사령부연합번역통역국조사보고,『일본군위안시설』제2절위안시설9위안소b버어마(1)`까지 수록되어 있어 위안부문제를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1905년---을사조약의 해에 태어난, 그러니 일기를 쓸 당시엔 삽십대 후반이었을 한 조선인청년의 일기는 전체적으로는 대단히 단조롭다. 가끔씩 나타나는, 다른 업자들이나 위안부들이 폭격으로 부상하거나 사망했다는 이야기들만이, 그가 있는 버어마가 일본제국의 전투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뿐이다. 

그럼에도, 천황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쓰인 `적의 죽음과 목숨을 제압할 결전의 해`(142)라는 정월초하루의 다짐이나 한국의 상식이 되어 있는 위안소의 풍경과는 다른 풍경들은 이 책의 단조로움을 깨고도 남음이 있다. 한사람의 `조선인황국신민`에 의해 쓰인 이 일기는, 위안소에 관한 조선인의 깊은 개입상황과 함께 일본군과 위안소의 관계, 혹은 식민지시대의 일본인과 조선인의 관계자체를 재고하도록 요구한다. 

일기에 나타나는 위안소의 중심풍경들은, 관리인은 물론 위안부도 참여하는 위안소조합회의라든가, `고용인 버마인`을 데리고 `인도인 전기상`을 찾아가는 점령자=`제국인`으로서의 조선인(실제로는 그들은 그 곳에서 일본인이었다)의 모습 (69), 혹은 위안부들의 도착과 귀국에 필요한 수속을 위한 관리인의 군부대와의 접촉, 하루하루의 위안소수입계산, 위안부들을 대신한 저금이나 송금 등의 모습이다.

  위안부는 임신하면 강제중절 당했고 폐업의 자유도 없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상식이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위안부가 출산을 했다거나(207), 폐업이나 귀국 (169,182,185,193,206,209)에 관한 이야기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에 더해 영화구경이나 외출, 혹은 관리인과 함께 `구급법(응급처치)`을 배우거나 국가의 기념식에 참석하거나 일본군인의 묘소를 청소하는 모습 등도 보인다. 



이렇게, 여기에서 보이는 위안소의 일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감금과 저항`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위안부의 `비참과 고통`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한 `부재`가 곧 이 위안소가 비참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저축 가능할 정도의 돈을 벌고 때로 영화구경이 허용되는 생활이었다 해도 위안소란 여성들에게는 근본적으로는 비참한 공간일 수밖에 없다.(박유하『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그런데 그러한 `비참`을 가장 잘 보았을 이 관리인은 왜 그런 부분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의 침묵은,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업자`와 일본군의 관계의 본질을 명확히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의 `회의 없음`(서술의 부재)이 보여주는 것은, 이 관리인이 특별한 친일파나 예외적인 악한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전쟁`에 협력한 당시의 `국민`= `보통사람`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조선인여성들을 일본군에 제공하면서도 특별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곳에서의 행위--`위안`이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를 <일본 대 조선>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해 그저 동포를 `적`에게  넘긴 가해자라거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군의 지시에 따른 피해자로만 보는 것은 이 `관리인`의 침묵과 위치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시각자체가 해방 이후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가 그저 침묵으로 위안소업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은, 그가 `제국일본`이 만든 `황국신민`이었고 그 작업이 그에게는 `국가를 위한`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1)

그렇게 보았을 때 비로소, 위안부들이 부상당한 군인을 위한 응급조치를 배운다거나 병사들의 묘지를  청소한다거나 하는(157,211,227,266)행위 역시 이해될 수 있다. 말하자면 업자와 위안부들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피지배자라는 의미에서의 피해자이지만, 그저 단순한 `피해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때로 다른 위안소에 가서 자고 오거나 (167), 포로수용소의 군속이 위안소를 이용한 것이 `헌병에게 발각되어 조사중` (208) 이라는 이야기는,(예컨대 당시의 포로수용소감시원들이 다름 아닌 조선인남성들이었다는 것을 참고하면,)2) `위안소`란 조선인들도 이용하는 장소였다는 것, 다시 말해 조선인 역시 `일본인`으로서 `일본군위안소`를 이용했다고 하는 아이러니에 독자를 맞닥뜨리도록 만든다. 

안교수 역시, 업자들 중에 조선인이 많았고 조선땅에서는 `헌병이나 경찰이 직접 위안부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고 위안소업자들이 위안부들을 모집`(23)했다고, 명확히 설명하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이 일기는, `군이 강제연행`해 갔다고 하는 국민적 상식을 바꾸어 놓는 획기적인 내용이 되고 있기도 하다.


3
1)`광의의 강제동원`이라는 이해틀의 문제

그런데 안교수는 위안부는 `영업수단으로서 개별적으로 모집된 것이 아니라 일본군부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동원`(16)되었다고 말한다. 일기에 나오는 `제4차위안단`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순차적으로 동원해 갔다면 그것은 단순한 관여가 아니라 징용 및 징병, 정신대와 같은 일본정부의 전시동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동)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안교수는 `일본군부가 조선군사령부와 협력하여 조선에서 차례차례로 위안단을 조직하여 위안부들을 해외로 출진시켰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위안단의 조직`까지의 과정에 얼마만큼 군이 개입했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위안부의 증언집을 보면, 각 지역에서 데려온 여성들을 업자가 배에 태워 인솔해 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곳에 모인 여성들 중에는 이 책의 부록에도 나오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응모`(408)한 여성도 섞여 있었다. 다시 말해 모집의뢰는 군부가 했어도 배에 타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같지 않았다. 속아서 온 사람이 있다 해도 `위안단`자체는,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집단이라기보다는, `국가를 위해` 출진하는 병사집단처럼, 표면적인 자발성과 내부적인 강제성이 만든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군이 일부 업자들을 `군속`으로 대우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위안부문제에서의 군의 역할이, `관여`에 그치지 않는 `관리`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는 `광의의 강제동원`이라는 안교수의 결론은 정확하다. 

그런데 문제는 `위안`을 둘러싼 다양성-시기와 장소-에 따라서 위안소와 위안부를 둘러싼 상황이 천차만별로 다양했다는 사실을, 이런 정리가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에 있다. 설사 `전차금`의 10퍼센트를 군부가 지급(27)했다고 해도, `광의의 강제동원`이라는 표현은 군부가 요구한 정식계약이외의 인신매매적 상황이나 가난 혹은 그 밖의 이유로 표면적`자발적인 참여`를 한 이들의 존재를 배제하는 것으로 기능하고 마는 것이다. 

예컨대 안교수는 `버마전국에 분포`(30)되어 있었던 위안소들을 전부 `일본의 조직적 동원`(32)에 의해 생긴 것으로 간주하지만, 전쟁과 함께 `보급`된 위안소이외에 전쟁 이전부터 아시아지역에 나가 있던 기존의 매춘시설의 경우까지 똑같이 `광의의 강제동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3)  

일본군은 주로 기존의 매춘시설을 `장교를 위한 `위안소`로서 전쟁말기까지 이용했다. 그에 반해 부대안이나 가까이에 만들어진 군위안소는 대부분 병사들을 위한 것이었다. 사쿠라클럽이니 칸파치클럽이니 하는 이름의 장교용 위안소들을, `영업수단으로서의 개별적인 모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확히는 그 양쪽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고 이해해야 하고, 시기와 장소에 따라 그 양상은 달랐다는 것이 먼저 인식될 필요가 있다.

군부에 의한 위안부동원은 분명 국가에 의한 `유연한 국민동원`이라 해야 할 사태이지만, 모든 상황을 `조직적 동원`으로 규정하게 되면 다른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합법적` 동원들—예컨대 징용이나 징병과의 차이가 보이지 않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조선인일본군과 달리, 위안부 동원은 `법`에 근거한 동원은 아니었다. 그리고 문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근대국가시스템은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에게는 최소한의 법의 보호조차 행하지 않았다. `위안단`의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이루어진 `감언과 사기`는 군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업자나 다른 인신매매자에 의한 것임을 여러 증언이나 자료들은 말한다. `조직적인 동원` 혹은 `강제동원`이라는 단어는 그런 업자의 범죄를 면죄하고 만다. 


2)군의 통제의 양측면

분명 이 책은 위안소가 군의 엄격한 관리하에 있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고 위안부문제를 정치적으로 풀 때는 그 부분이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위안소의 형태에 따라 그 관계의 긴밀성 역시 달랐다는 것도 학문적으로는 인지되어야 한다. 

군이 이용 가능하도록 그냥 지정만 했던 민간업소와 부대 안에 존재한 위안소의 통제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위안소가 위안부의 해고동의서나 폐업동의서를 `교부`받았다는 것은 군의 통제와 권력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런 통제바깥에 존재한 위안소들의 존재와 그곳에서 일한 위안부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군의 `관리`는 양가적인 측면이 있었다. 예컨대 안교수는 한번 결혼해 나갔던 위안부가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을 `강제로 재취업(38)`한 것이고 `폐업이 어려웠던`(38) 증거로 보지만` 병참의 명령`이란 꼭 위안부들에게 억압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안부들은 때로 군인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보다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업자에게 `명령`해 주기를 부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환 가능했던 여성들이 `쉽게 설득`되었다는 말을 꼭 `군의 억압`으로만 볼 수는 없다. `종군위안소`가 대체적으로 병참의 `명령에 따라`움직인 것은 사실이지만 `명령`을 군의 이익만을 위한 것으로 판단하는 일은 그 `명령`을 자신을 위해 이용한 업자나 위안부자신의 의지를 배제하고 만다. 귀국하는 위안부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폐업이 어려웠다`(42)는 단정은 그렇게 일기본문을 배반하고 있다.

실제로 군부가 업자로부터 위안부들을 보호하기도 한 정황은 위안부의 증언집에서는 도처에서 보인다. 헌병들은 위안소에서 군인이 `과음이나 싸움을 못하도록`(420) 했고 폭행은 물론 업주의 부당한 착취까지도 감시했다. 수입보고서를 받은 것이나 작부에 대한 `인가서`등 관련서류를 받아야 했던 것은(224)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위안부의 도착시  업자들이 그 여성에 관한 제대로 된 서류를 갖고 있는지 체크한 것은 업주가 `사기`로 데려온 사람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예를 들면 군대 상층부가 위안부를 어떤 부대로 보내자 부대가 업주에게 매상예상금액을 건네고 `위안`활동 없이 자유롭게 지내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군의 `통제`가  업자로부터의 위안부의 해방으로 기능한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일례이기도 하다.4)

위안소가 군부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제국권력하의 식민지로서의 피해였음은 분명하지만 그런 인식을 강조하려 하는 인식이 군의 `관리`활동에는 업자의 착취를 막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은 위안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방해할 뿐이다.

   `모처 부대장이 와서 가자 하는데, 위안부 일동은 절대반대하며 못가겠다`(61)고 했다는 이야기 역시 위안부들의 의사가 어느 정도 존중되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관리인이 군인장교에게 `여자들의 주선을 의뢰`(103)하는 장면은, 있을 곳이 없는 위안부들을 위해 군이 장소를 제공했던 경우를 떠올리게 한다.5) 


3)군대와 위안부

일본군과 조선인위안부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당시 식민지가 된 결과로 조선인 역시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위안부들이 일본군의 묘소를 벌초하고 청소하거나 근로봉사작업을 하거나 전쟁수행을 위한 궐기대회를 하는 장면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의의 강제동원`이라는 개념은,  `위안`이 기본적으로는 `애국`행위이기도 했던 상황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안교수는 `폐업이 어려웠다`는 것을 전제로 기존의 `성노예설`을 지지하지만 이렇게 그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위안부가 군편제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되어 군부대와 같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42)던 것은 위안부가 `군의 노예`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업자의 노예`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책임을 정확히 묻기 위해서도, 그 차이는 명확히 해야 한다. 

덧붙이자면,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던 이유 중 하나는 육로로 이동 가능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쟁말기에는 바다를 사이에 둔 일본과의 이동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6) 그런 정황과 현장에서 일본인위안부는 주로 장교를, 조선인 위안부는 주로 병사들을 상대하게 된 배경을 정확히 파악할 때 조선인위안부들이 놓여야 했던 고통의 구조를 더 정확히 물을 수 있다.


위안부와 업자에 대한 군대의 권력은 양가적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군이 위안부를 `하부조직`으로 편제하는 식의 관리와 통제는 위안부를 보호하는 모순적인 기능도 갖고 있었다. 일본군 위안소의 양상이 드러나는 자료집에 관한 설명이 `광의의 강제동원이자 성노예`라는 결론에 그친 것은 그래서 많이 아쉽다. 상반된 군의 기능을 정확히 보고 그에 입각한 정확한 비판이야말로, 대일본제국주의의 <신민>이었던 일기의 주인공과 일기가 등장시킨 위안부들을 위해 필요했던 일이 아닐까. 

과거가 아니라 자신의 현재를 위해 역사속 인물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전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주)

1. 이 글에서 주석을 달지 않고 쓴 내용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한 박유하『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2013/8,뿌리와 이파리)에 의거한다.

2. 영국군 포로의 수기『歴史和解と泰麺鉄道』(ジャック・チョーカー、朝日選書、2008)권말 대담에서의 박유하 발언

3. 倉橋正直는『従軍慰安婦と公娼制度』(倉橋正直、共栄書房、2010)에서,일본군의 진출에 따라 군부대 주변에 각종 상업시설이 들어섰고 매춘시설이 많았음을 밝히고 있다.

4. 谷川美津枝『青年将校と慰安婦』(みやま書房、1986)

5. 長沢健一『漢口慰安所』(図書出版社、1983)

6. 『漢口慰安所』(図書出版社、1983)

[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