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세상

시온주의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사실 19세기까지만 해도, 지금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그리고 소수의 유대교인 등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각자의 삶의 근거지를 갖고 생활하던 유대인들 역시 그 다수는 굳이 팔레스타인 땅을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시온주의운동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시온주의자들은 본래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이며, 핍박받는 처지를 끝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 ‘오직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민족주의 신화들이 그렇듯이, 시온주의자들도 고대 이스라엘왕국으로부터 이어지는 허구적인 이야기로 응집력을 만들어갔다. 유럽 각국에서 경험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 때문에, 사실상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실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자들의 민족주의 선동이 점차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장악하기 위해 제국주의 열강에 들러붙었다. 영국이 패권을 쥐고 있을 때에는 영국과 협력했고, 이후에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촉진하기 위해 나치와 은밀하게 협력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제국주의 패권이 미국으로 이동하자 이번에는 미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만들어갔다.

제국주의의 경비견

그런데 변변치 않은 처지의 소수 시온주의자들이 어떻게 제국주의 열강들과 협력관계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 방법은 간단했다. 아랍인들의 영토에서 쏟아져 나오는 석유를 탐내던 제국주의 자본가들을 위해 앞잡이가 돼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건국 후 몇 년 지난 1951년에 이스라엘의 일간지인 ≪하레츠≫는 그런 의중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이스라엘의 힘을 키워주는 것은 서방 열강들이 중동에서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스라엘은 경비견이 될 수 있다.”

거꾸로 보면, 제국주의 열강들의 입장에서는 시온주의운동 같은 세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제국주의와 결탁한 시온주의자들이 아랍세계의 옆구리로 파고들어 균열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면, 자본주의산업의 생명수인 석유를 장악하고 세력권을 재편하는 데 아주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니까 말이다. 그 결과, 오랜 기간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서방 강대국들이 이제는 시온주의자들에게 줄을 대고 자금과 무기를 건네는 얄궂은 장면전환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더러운 거래에는 비극이 따르기 마련이다.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독일과 한편이 된 오스만 터키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영국에 협력해주는 아랍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영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맥마흔 선언).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유대인들을 매개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시온주의자들의 계획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발포어 선언).

이 두 가지 약속은 결코 동시에 충족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세력의 이익을 위해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을 적대관계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애초부터 기꺼이 제국주의의 경비견이 되겠다고 작심했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패권을 위한 행동의 한 축으로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20세기로 넘어와 야금야금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추진하던 시온주의자들은 1947년 12월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1948년에는 시온주의 민병대가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75만 명을 추방하면서 팔레스타인 땅을 강탈했다. 그들은 400개 이상의 마을을 휩쓸고 다니면서 총, 수류탄, 칼로 팔레스타인을 ‘청소’했다. 이스라엘은 건국과정에서부터 피로 범벅된 폭력적인 침략자로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억압자로서 등장한 것이다. 애초에 팔레스타인 영토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태생적으로 인종차별적이며 잔인한 인종청소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국가

그런데 이렇게 폭력적으로 등장한 국가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보복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에게는 어떤 생존방법이 필요했을까? “아랍민족은 땅을 빼앗기고, 1백만 명이 넘는 난민문제를 안고, 여러 차례 군사적 패배의 굴욕을 당했다. 아랍민족의 복수가 두려워서 반(半)광란 상태가 된 이스라엘 국민은, 자기 정부의 기동력이 되고 있는 ‘원칙’ 즉 이스라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몇 해마다 한 번씩 아랍 국가들을 반신불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전쟁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두 말 없이 받아들였다.”(아이작 도이처, “유대 시온주의의 본질”, http://wspaper.org/article/248)

즉 제국주의가 최종적으로 세력권의 재분할을 둘러싼 열강들 간의 군사적 대결을 거듭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제국주의의 파생물로 등장한 이스라엘 역시 거듭 주변 국가들을 향한 군사적 깡패행위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원칙’은 한편으론 주변을 포위한 아랍 국가들을 직접 겨냥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제국주의 열강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제국주의의 경비견 역할을 자처하면서 등장한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생존하려면 패권국가의 지원과 협력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제국주의 패권국가에게 자신의 ‘효용가치’를 지속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뛰어난 전쟁수행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주기적으로 보여주는 게 그 방법이다.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이스라엘 국가수립을 선포하자마자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와 격전을 치른 1948년의 1차 중동전쟁. 영국, 프랑스와 손잡고 이집트를 공격한 1956년의 2차 중동전쟁.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과 싸우면서 이스라엘의 영토범위를 건국 초기보다 여덟 배 이상 확장한 1967년의 3차 중동전쟁. 또 다시 영토문제로 이집트, 시리아와 벌인 1973년의 4차 중동전쟁. 1978년 레바논 침공. 1982년 레바논 수도 점령. 2000년에 철수한 뒤 2006년 다시 레바논 침공.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을 겨냥한 항구적인 침탈.

제국주의의 왕권을 쥔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권 확대 시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압력을 넣었던 2차 중동전쟁을 제외하면)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의사와 막강한 후원을 철회하지 않았다. 미국의 대외원조 예산규모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항상 이스라엘이었다. 중동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동맹은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어떤 동맹보다도 강력하게 유지됐다. 시온주의와 제국주의가 결혼해 낳은 자식이 곧 이스라엘이라는 핏덩어리다.

동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스라엘 지배계급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졌다.

우선 외부요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미국의 지배력이 세계경제위기와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국 제국주의의 중요한 중동사업이었던 이라크침공에서 미국은 확고한 장악력을 보여주는 데 실패한 채 점점 수렁에 빠졌다. 이스라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집트에서 대중반란이 일어나고 친미 독재자 무바라크가 퇴진당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이렇다 할 개입을 하지 못했다.

1978년 캠프데이비드협정을 체결한 이래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 역할을 했다(이 협정으로 이집트는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긴 시나이반도를 돌려받는다). 미국은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은 예산을 들여 이집트를 원조하며 길들여 나갔다. 그런데도 미국이 이집트 정세를 자기들 뜻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정부의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내부요인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한국 지배계급이 ‘북한의 위협’을 이용해 노동자운동을 압살해왔던 것처럼, 이스라엘 지배계급 역시 주변 아랍 국가들의 위협을 과장하면서 내부의 반발을 짓눌러왔다. 하지만 2008년 이래 지구 전체를 흔들어놓은 세계경제위기의 파동이 이스라엘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1년의 시위가 상징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주거비를 포함해 물가가 급등하면서 그해 7월에 15만 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8월에는 31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9월에는 무려 45만 명이 이스라엘 곳곳에서 빈부격차와 물가상승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제 이스라엘은 결코 투쟁의 불모지가 아니었다.

내부로부터 그리고 아래로부터 일어난 균열

이스라엘의 경제 중심지인 텔아비브에선 치솟는 주거비에 항의하는 뜻을 담은 농성 텐트촌이 등장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농성 텐트촌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인티파다)로부터 영감을 얻은 게 분명한 ‘텐티파다’라는 이름이 붙었다. 종종 이스라엘인 전체를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악마’로 취급해버리는 시선도 있지만, 그들 중 일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분명히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2년엔 지난해의 시위를 되새기는 1주년 시위가 벌어지던 와중에, 질병으로 장애를 얻었으나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던 40대 남성이 분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13년 4월엔 3개 항공사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2014년 1월엔 주로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주 노동자들이 불법이민자 구금정책에 항의하면서 5~6만 명 규모의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2004년에도 재정적자를 빌미로 3개 항만을 민영화하려는 시도에 맞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빈부격차 수준은 상당히 악화됐다. 2011년 한국에서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격차가 10배였는데 이스라엘은 훨씬 더 큰 14배로 조사됐다. OECD 기준 빈곤율에서도 이스라엘은 가장 높은 수준이었고,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도 OECD 회원국 중 다섯 번째로 높았다. 중국의 새로운 노동자세대가 중국 지배계급의 기만적인 ‘사회주의’ 구호에 더 이상 영향 받지 않고 노동자로서 투쟁에 나서기 시작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들 역시 강렬한 시온주의의 영향력에서 아주 조금씩 벗어나는 조짐을 보여준다. 이는 이스라엘 지배계급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위협이 될 것이다.

이렇게 내부로부터 불만과 저항의 기운이 커져갈 때, 지배계급이 취하는 통상적인 수단이 무엇인가? 바로 치명적인 ‘외부의 위협’을 등장시켜 대중의 불만과 관심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출발점에서부터 ‘유대인을 몰살시키려는 아랍인들’이라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고 전쟁을 치르며 등장한 국가라는 점에서,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쇠퇴와 위기 속에서 막강한 제국주의 후견인이 흔들리고 내부로부터도 기만적인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점에서, 한층 더 강렬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외부의 위협’에 맞선 전쟁을 유발하려는 경향이 강화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의 야만적인 학살극으로 표현되고 있다.

아랍민족주의의 부패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런 이스라엘의 야만주의를 제압할 힘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아랍민족주의라는 간판 아래 여러 나라들을 묶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아랍민족주의가 얼마나 허약한지는 1차 중동전쟁에서의 처참한 패배에서부터 드러났다. 무려 다섯 개 나라가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이들 나라는 각자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일치단결하지 못한 채 모욕을 당했다. 그 다음엔 이집트가 아랍의 동맹국들에 등을 돌리고 떨어져 나와 이스라엘, 미국과 나란히 섰다.

이스라엘에 공격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배계급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대표적인 두 정치세력인 ‘하마스’(HAMAS : ‘이슬람저항운동’이란 뜻의 아랍어 머리글자)와 ‘파타’(Fatah :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이라고도 불린다)가 각각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관리하고 있는데, 파타는 일찌감치 이스라엘에 협조적인 노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심지어 2004년에는 당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인 아흐마드 쿠레이아 소유의 시멘트회사가 서안지구 고립장벽(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을 사실상 거대한 감옥으로 만드는 장벽)을 짓는 데 쓰이는 시멘트를 이스라엘 측에 공급하기까지 했다.

이런 부패상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의 불만이 점차 커졌다. 그러는 동안 하마스는 천천히 세력을 확대했으며, 2006년 총선에서 파타를 제치고 집권당이 됐다. 파타의 부패에 신물이 난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하마스가 한층 더 나은 대안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마스가 팔레스타인과 중동에서 진보적인 역할을 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마스는 파타가 이스라엘에 대한 타협노선으로 미끄러졌다고 비난하며 다퉜지만, 실은 하마스 역시도 기존 팔레스타인 영토의 22%인 서안지구, 가자지구, 동예루살렘만 보장해준다면 이스라엘을 인정할 것이라고 수차례 밝혔다.

또한 하마스는 이집트에서 한창 대중반란이 전개되던 시기에, 자신들의 모태인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에서의 운동에 깊숙이 연루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내에서 연대시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제시켰다. 이는 하마스의 정치적 전망이 어디까지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차례의 인티파다가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무능력하고 부패한 지배계급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하마스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이집트에서 건너온 혁명적 분위기가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할 ‘위험성’을 경계한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을 비롯한 이른바 ‘국제사회’가 최근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의 지배계급은 그간의 동맹관계에 충실하게도, “로켓으로 공격받는데 방어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니냐”, “하마스가 사용하고 있는 로켓 발사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지상전이 불가피하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이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이다). 미국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 마이클 오렌은 확신에 찬 태도로 “미국은 어떤 조치든지 전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국제사회가 더 노력해야 한다”는 하나마나한 소리만 늘어놨다.

그렇다면 지금의 비극을 끝장낼 수 있는 해결책을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민족주의가 답인가

이스라엘 군대의 야만적인 공격과 참상 때문에, 지금 가장 두드러진 반응은 “이스라엘인들을 몰살시켜야 한다”는 부류의 주장이다. 아랍세계의 지배자들은 한 때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며 허풍을 떨곤 했다. 지배자들의 허풍과는 분명히 차원이 다르지만, 대중의 일부 역시 이런 반유대인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곤 한다. 최근 유럽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 규탄시위에서도 종종 극단적인 반유대인 감정이 표출된다.

그런 감정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적어도 무조건적인 이스라엘, 미국 지지자가 아닌 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이스라엘이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 자신이 나치의 야만적인 인종청소에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이제 와서 나치와 다를 바 없는 인종청소 행위를 스스로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들을 몰살시켜야 한다”는 극단적 민족주의는 그것을 또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갖는 가장 큰 위험은, 이스라엘 내부의 계급대립을 지워버림으로써 대안의 탄생을 더욱 지체시킨다는 점이다. 2011년의 대규모 시위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스라엘인은 결코 단일한 공동체가 아니다. 그들의 일부는 여전히 시온주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극우세력이지만, 다른 일부는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인’이다”, “새로운 이스라엘인들은 변화를 요구하고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이는 2011년 시위에 참여했던 전국학생연맹 회장 이치크 슈물리의 발언이다). 또 다른 일부는 노동자로서 자신의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벌인다. 극우 시온주의세력은 절망을 안겨줄 뿐이지만, 새로운 투쟁 물결을 만들어내는 젊은이들, 노동자들은 희망을 보여준다.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이스라엘인, 유대인으로 싸잡아서 증오를 퍼붓는다면 그건 희망의 싹을 우리 스스로 밟아버리는 큰 실수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야만행위에 분노하는 많은 이들이 평화를 바란다. 우리 역시 더 이상 무고한 죽음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억압자들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평화가 정착될 거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시온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착취와 지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저들의 억압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이 해방되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물론 그 힘의 사용이란 이스라엘의 노동대중이 다니는 학교나 식당, 쇼핑몰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그런 방식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니라 악화시키는 길이며, 무고한 또 다른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잘못된 길이다.

팔레스타인 해방

대안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 없을까?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다른 각도에서도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원하는 ‘팔레스타인 해방’이란 무엇인가? 하마스와 파타는 시온주의와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거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마스와 파타는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할 것이며,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공습의 두려움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가난, 실업, 교육 및 의료시설의 부족을 이슬람 지배자들이 결코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갈수록 깊어지는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 위기가 지금은 이스라엘 정부 및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탈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들의 공습을 중단시킨 뒤에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가난이라는 폭탄을 노동자들의 머리 위로 퍼부을 것이다. 이 자본주의의 공습을 끝장내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구호는 항상 기만적인 것으로 남을 것이다.

제국주의 강대국도,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도, 아랍세계의 이슬람 지배자들도 팔레스타인 해방을 보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단지 세계 자본주의 사슬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높거나 낮을 뿐, 똑같이 자본주의적 착취에 바탕을 둔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꽉 쥐고 있는 자본주의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 바로 여기에 최종적인 팔레스타인 해방의 길이 있다.

유력한 방법

어디에서 힘을 끌어내야 그 길을 뚫어낼 수 있을까? 방법이 있다. 노동자계급의 힘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지금은 이스라엘의 잔혹한 탄압으로 상당히 위축됐지만, 팔레스타인에서도 지난 세기 내내 노동자운동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이스라엘 점령이 팔레스타인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 참조 : http://pal.or.kr/xe/155679). 팔레스타인의 산업기반이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보다 뒤처질 정도로 매우 취약한 건 사실이다. 그것조차 이스라엘의 오랜 봉쇄조치로 거의 질식당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하마스 같은 퇴행적 정치세력이 아니라, 1936년의 총파업으로 힘을 드러내고 두 차례의 인티파다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노동자들에게서 팔레스타인 해방의 힘이 자라날 거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노동자들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지배자들에 맞설 수 없다. 동맹자를 구해야 한다. 가장 가까이는 시온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에 분노하는 아랍세계에서 동맹자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답이 아닌 것으로 증명된 아랍민족주의 따위와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무기력한 아랍민족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은 그들 지배계급과는 다른 계급, 즉 아랍세계 노동자들과의 국제적 연대로부터 솟아날 것이다.

특히 2011년 이집트 노동자들은 무바라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노동조합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수준에서까지 조직하고, 파업과 시위의 주력부대를 형성하는 실력을 보여줬다.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이집트 노동자들은 중동지역에서도 가장 규모 있는 세력이며, 2011년 이전부터 상당한 투쟁 경험을 축적해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할 때,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인티파다)가 전개될 때 이집트 노동자들은 기꺼이 거리로 몰려나와 함께 목소리를 냈다. 제국주의의 파트너 구실을 한 이집트의 지배자들, 엘리트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싸운다면 그 무엇보다 강한 팔레스타인 해방의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온주의자들의 억압을 뚫고 나오는 이스라엘 내의 투쟁 가능성에 주목하고 거기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의 동맹자를 구하는 것도 놓칠 수 없다. 오랜 세월 이들의 정신을 마비시켜 온 시온주의의 영향력 때문에 그 변화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가 자신을 ‘새로운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음을 잊지 말자. 지금도 전 세계 유대인의 상당수가 이스라엘 규탄시위에 동참하고 있으며, 맑스,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 혁명운동에 직접 참여한 유대인도 부지기수였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자.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불굴의 저항의지가 격동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이집트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만나고, 제국주의 경비견의 거죽을 뚫고 나올 이스라엘 노동자들과 함께 뭉칠 수 있다면, 바로 그곳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의 열쇠를 움켜쥘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팔레스타인 해방은 국제적으로 단결한 노동자계급의 주도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곧 중동에서 제국주의의 패권질서가 깊고 넓게 찢겨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이 심화될수록,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랍 지배계급들의 무능력과 소심함과 반동성이 더욱 뚜렷하게 입증될 것이다. 그것은 다시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과 공동의 투쟁 외에 그 무엇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든 아랍세계 노동자들에게 각인시킬 것이다. 제국주의와 그 경비견의 발톱을 부러뜨린 아랍 노동자들은 스스로 역사를 전진시키기 시작했다는 사실로부터 엄청난 정치적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자신감이야말로, 노동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건설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원천이다. 우리 역시 마땅히 그 길에 함께 나서야 한다. (2014년 7월 24일)